점심에 구내식당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식 아니면 양식, 이거 아니면 저거, 둘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그나마도 귀찮을 때는 대충 보고 줄이 짧은 쪽에 선다. 뭐 대단한 것을 먹겠다고 긴 줄에 서나? 오픈런도 아니고.
식사 모임에 다녀온 아내가 요즘은 선택할 게 너무 많아 곤혹스럽다는 다른 엄마들의 말을 전했다.
"그냥 아무거나 주면 좋겠어. 자꾸 물어보지 말고."
"난 키오스크 앞에만 서면 머릿속이 하얗게 돼. 뭘 자꾸 더 고르래? 커피 한잔 마시려고 몇 단계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인지."
인터넷으로 옷 한 벌 사려 하면 백만 개쯤 되는 다양한 옷들이 끝도 없이 스크롤된다. 이른바 무한 스크롤. 어떻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해도 선택은 끝나지 않았다. 브랜드마다 사이즈가 달라 치수별 정사이즈를 재야 하고 구매자들의 후기도 읽어야 한다.
별점 1점 : 디자인이 좋아 샀는데 세탁기 한번 돌렸더니 아기옷이 됐어요ㅠㅠ 이거 반품되나요?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별 하나' 댓글은 언제나 있기 때문에 이런 후기에 일일이 반응하다가는 하나도 사지 못한다. 자, 후기도 괜찮으니 이제 구매 버튼을 누르면 되나? 절대 아니다! 그랬다가는 아내의 불호령을 피하기 어렵다. 다른 사이트와 가격 비교를 하지 않은 것이다. 카드할인이나 적립금 혜택은 없는지 곧 세일 시즌이 오는 것은 아닌지, 반품 배송비는 얼마나 하는지도 꼼꼼히 챙겨야 혼날 일이 적다.
다양성과 선택의 자유 그리고 개인화된 경험을 표방하는 디지털 사회는 어떤 면에서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무슨 영화를 봐야 할지 몰라서 OTT 플랫폼에서 한 시간 동안 검색만 하다 끝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시간을 알차게 보낸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쉽게 선택하지 못하고 끝없이 고민하기 때문이다.
'이 선택이 최선인가?' 참고로 최선의 선택은 거의 없다.
"지금 구매하세요" "이벤트에 참여하세요" 하는 식의 문구는 지금 안 하면 꼭 손해 볼 것 같은 불안감을 조성하고, "좋아요를 누르세요" "댓글을 남기세요" 같은 문구는 안 하면 나만 무심하고 나쁜 놈이 되는 것 같아 외면하기 어렵다.
이러던 차에, "뭘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죠? 당신에게 딱 맞는 선택을 도와드립니다."라는 선전은 우리를 두 번 속인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으로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한다면서 '내가 좋아하는' 선택지를 끝도 없이 제시한다. 인간적으로 맞춤형 콘텐츠라면 선택의 폭을 좀 좁혀 줘야 하는 것 아닐까?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며? 내가 전부 다 좋아해?
너무 많은 선택 속에 살다 보니 결정 피로감을 느끼는 게 당연해 보인다.
미국의 행동 경제학자 배리 슈워츠는 '선택의 역설'이라는 책에서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의 삶이 더 불행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선택의 증가가 개인의 결정 피로와 후회를 증폭시켜 오히려 만족도를 낮출 것이라 했는데 지금이 딱 그렇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입어 보고 마음에 들어 사놓고 온라인에서 30% 싼 똑같은 옷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좌절감이란.. 정말 모르는 게 약이다. 이러니 매장에서 뭐 하나 쉽게 살 수 있겠나.
선택도 힘든데 어렵게 한 선택에 만족하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다 보면 선택을 남에게 미루게 된다. 알잘딱깔센,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해라. 이런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결정 피로감을 벗어나고자 선택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오마카세' 역시 고객의 결정 피로감을 덜어 준다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오마카세는 돈이 많이 든다. 내가 돈이 많고 권력이 있다면 주변인이 알아서 뭐든지 오마카세로 잘해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인지 불안하고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할까?
직접 선택하는 대신 권위적인 리더나 시스템에 의존하는 방법이 있다. 이 경우, "내가 선택하지 않았으니 내가 책임질 필요 없다"는 심리가 작용해 안정과 만족을 느끼게 한다. 매번 선택하는 것보다 정해진 룰이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것도 같은 방식이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 도피>에서 나치즘이 독일 민족을 지배할 수 있었던 메커니즘을 설명했다. 역사적으로 과도한 혼란과 선택의 스트레스를 겪을 때 사람들은 간단하고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강력한 지도자를 지지했다.
히틀러는 대중에게 '더 이상은 선택할 필요 없다'는 안도감을 주면서 자신이 창조한 세계관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1차 대전 이후 피폐한 일상에 극한 피로감을 느꼈던 독일 국민들은 뭘 해도 나아질 게 없는 현실에서 선택 그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하게 됐는데 그것이 바로 이민족(유태인)에 대한 과잉 폭력이었다.
이처럼 선택을 회피하고 자유를 헌납할 때 인간 사회는 부정적 결과에 노출되기 쉽다. 가톨릭이 지배했던 중세 유럽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대신 자유를 헌납했기에 그 대가로 수많은 불합리 속에서 종교적 억압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신을 믿는데서 오는 평안함도 누릴 수 있었는데 교회가 시키는 대로 하면 천국에 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환상이라 할지라도.
에리히 프롬이 제시한 '자유로부터 도피 메커니즘'은 지금도 적용 가능하다. 위험부담이 있는 선택을 피하고 전문가나 브랜드, 알고리즘에 의존함으로써 선택의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무작정 트렌드를 따라간다든가 평균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비슷하다. 그것도 아니면 '아무거나 보기' 같이 아예 무작위 선택을 하기도 한다. 괜히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고민할 필요 없다는 편리와 결과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유용성이 잠재의식 속에 만족감을 심어 준다.
선택 과잉 시대,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슬기롭게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너무 많은 자유를 헌납하지도 않고 도피하지도 않고 말이다. 디지털 테크닉이 마련한 다양성과 가성비를 모두 챙길 수 있는 방법!
첫 번째 전술은 자기만의 결정 루틴을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같은 조건에서 동일한 행동방식을 정해 실행한다. 날씨가 흐리면 바디감이 있어 향이 낮게 깔리는 원두를 선택한다. 점심에는 꼭 단백질이 많은 메뉴를 고른다. 영하 2도부터는 패딩을 입는다. 잠자기 전에는 이미 본 것이라도 심각하지 않은 SF나 판타지 콘텐츠를 시청한다. 등등.
두 번째는 선택의 범주를 줄이거나 정해 둔다.
몇 번 입어 보고 색감이나 치수가 잘 맞는다 싶으면 해당 브랜드를 기억해 뒀다가 다음번에는 좌고우면 하지 않고 해당 브랜드만 필터링해서 선택하는 방법이다. 유행과 취향은 계속 변하니 시간을 두고 선호하는 브랜드의 종류를 업데이트하는 것이 좋다. 이 전술은 의류뿐 아니라 음식, 여행지 다양한 상품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검정 티셔츠와 청바지만 고집했던 스티브 잡스처럼 의상 자체를 선택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방법도 있다. 옷 입는 방식을 제쳐 둠으로써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선택에 집중한 것이다.
세 번째, 반복 고민하지 않고 선택한 후에는 후회하지 않기.
인간이 창의적인 것 같아도 생각은 결국 도도리표다. 같은 변수를 놓고 고민하면 아무리 깊이 고민해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의식구조도 일종의 수학 함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후회는 어차피 늦었고 전혀 쓸모없다. 후회는 감정을 소모할 뿐 조금의 이득도 주지 않는다. 다만, 잘못한 선택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는 기억해 뒀다가 반복하지 않게 조심하자. 수업료 낸 셈 치고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것이다.
네 번째, 최상의 가치와 우선순위 설정하기.
거창해 보이지만 목표를 설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해 선택이 종속되게 하는 것이다. 실행하기 만만치 않지만 익숙해지면 선택은 훨씬 쉬워진다.
마지막,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
투표에 기권하는 것처럼 모든 선택에 참여할 필요는 없다. 자기에게 중요하다고 판단될 때를 제외하고 나머지 선택은 위임하거나 저절로 정해진 것을 따르면 된다. 어떻게 모든 것에서 주체가 되겠나?
에리히 프롬이 지적한 것처럼 완전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책임에 대한 부담이 불안함과 우울증을 야기할 수 있다. 대단하지 않아도 결과적으로 잘못된 결정 몇 번이 후회를 부르고 결정 장애를 유발하기도 한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면 당연히 두렵다. 인간의 뇌는 생존을 위해 부정적인 설정에 훨씬 디테일하고 민감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인간은 자유로워도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자유는 없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을 공유하고 싶다.
두려움에 정면으로 마주 서라. 그리고 한 발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