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스스로를 동정하는 새를 본 적이 있나?”
데미 무어가 주연으로 열연한 영화 <G.I. Jane>에서 네이비 씰의 훈련소 조교가 묻는다. 연일 계속되는 강도 높은 훈련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훈련생들은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데 그 와중에 조교가 뭘 묻는 것인지 몰라 당황한다. 영화를 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를 동정하는 새가 무엇이지? 자기 자신을 동정하는 새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매일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야생의 동물들은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는다. 자기 연민에 빠져 그나마의 생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날고뛰어 생존한다. 자기 연민은 스스로 만든 덫이자 질곡이기 때문이다.
자기 연민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나는 왜 이렇지? 나는 불안 해. 이런 생각에 빠져 들면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문제를 보지 않고 자기 아픔만을 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보다는 차라리, 내 인생이 가장 소중해! 남들이 뭐라 욕하든 이기적으로 판단할 거야! 이런 태도가 살아가는데 도움 된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쉽다면 얼마나 좋겠나? 나도 그러고 싶다. 이기적으로, 오직 나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나'지? 자식은? 부인은? 다른 개체라 하여 '남'으로 치부할 수 있나?
확장된 '나'의 개념은 자기 연민의 영역을 확대한다. 나의 불운뿐 아니라 가족의 불운까지 자기 연민의 테두리에 넣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내가 괜찮으면 괜찮지만, 내 자식이나 아내의 불행은 내가 괜찮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나인데 내가 아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나의 부분들이 자기 연민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이게 자기 연민의 공식이다.
자기 연민의 핵심은 내가 불쌍하다는 것이다. 불쌍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판단이 흐려지고 전혀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마침내 3자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하며 자아를 없애 버리고 싶다는 자기 파괴 욕구에 도달한다. 종종 자기 파괴 욕구는 완전히 방향을 바꿔 세상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뀐다. 자신을 이리 만든 세상을 원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스로 없어지기보다는 세상이 멸망하는 게 편리하다고 믿는다. 꼭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면 세상도 동시에 없어지길 바란다. 그래야 최소한 공평하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 연민과 세상에 대한 적대감은 종이 한 장보다 얇은 간격을 두고 위태하게 공존한다. 그래서 힘들다. 특히나 자기 연민은 이성적인 사람일수록 더 잘 빠져드는 함정이다. '나'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내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이 지점에서 자기 연민의 거의 유일한 긍정적 기능이 도출된다. 힘들다는 것을 아는 것!
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힘들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간다. 모르고 살아도 괜찮다면 그것도 복이다. 그러나 모르고 살다가 정말 힘들어지면 그때는 영문을 몰라 더 힘들어진다. 인간은 어떻게든 이유를 찾는 특수종이니까. 이유를 안다고 달라질 것 없어도 이유를 알아야 하니까.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자기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뾰족한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미리 안다면 조금은 개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뭐라도 알고 얻어맞으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또 운이 아주 좋아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자기 연민은 삶을 대하는 태도여서 쉽게 변하지 않는다. 서른 살까지 자기 연민을 하다가 서른한 살부터 하지 않는 일은 거의 없다. 또 불쌍하고 불운하다 여기는 것은 상대적인 감정이기에 사회적 관계망 속에 얽혀 있을 때 발생한다. 산속에서 혼자 명상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지는 않는다. 자기 연민에 빠져 산속으로 도피할 수는 있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는 수치심 때문이다. 이것밖에 되지 못했다는 생각.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이룬 게 없다는 생각. 그래서 남들의 시선을 피하게 된다. 남들이 나를 아는 게 수치스럽다. 아무도 나를 몰랐으면 좋겠다. 그래서 떠난다.
실상 혼자라면 창피하지 않다. 영화처럼 지구상에 완전히 혼자 남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변에 나를 아는 사람이 없으면 된다. 내가 누구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어디 사는지 등 지나가다 들른 편의점의 종업원처럼 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그런 곳. 그렇다면 전혀 창피하지 않다.
"아무도 모르면 돼. 아무도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니야." <나의 아저씨> 중
아무도 몰라도 내가 알아서 수치스럽긴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는 것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이 부러울 때는 바로 이럴 때이다. 나를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을 매일 부딪히고 살면 수치심이 날로 커져 감당하기 어렵다.
자기 스스로를 동정하는 새를 본 적 있는가,
없다. 새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아나? 애초에 새가 자기 연민에 빠지건 말건 그건 나와 아무 상관없다. 전 세계 모든 인간이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는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 건 죄가 아니다. 스스로 불쌍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공감의 가장 기초 단계다. 스스로에게 공감하고 이걸 기반으로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것이다. 특히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 느낀다면 자기 연민을 확장해 보라. 남도 나만큼 불쌍하다. 마냥 행복한 사람이 어딨나?
자기 연민은 자신에게 주는 시그널이다. 너는 지쳤고 특히 감정적인 영역에 상당한 문제가 발생했으니 조심하라! 이 시그널을 무시하면 다음은 우울증이나 번아웃이다. 그래서 인정해야 한다. 나는 자기 연민에 빠졌다. 그만큼 힘들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남들에게 하찮은 이유가 나에게는 실존적 이유가 될 수 있다. 나를 설명할 필요 없다. 나는 그냥 나여도 괜찮다. 잘 보일 필요 없다.
우울한 마음이 들면 종종 자문한다. 내 생애를 통틀어서 가장 좋았을 때는 언제인가? 대학에 붙었을 때? 취직했을 때? 논문 통과됐을 때? 언제인지 꼽을 수 있어도 그때의 행복감까지 소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위안이 된다. 나에게도 광휘와 같이 빛나며 영광스러운 순간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가장 빛나는 3초는 있다고 하지 않나.
그래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면 다음의 주문을 외워보자.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