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의심과 반성의 학문이다. 당연하게 믿고 있는 것을 의심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뒤집어서 한번 더 생각한다. 이를테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지금 책상이 있는 게 맞나? 책상 밑에 아무것도 없는 게 맞나? 코뿔소가 있지는 않나?
미친 소리 같지만 이러는 이유를 들어 보면 그럴듯하다.
"넌 눈에 보이는 게 다 맞다고 생각해?"
"당연하지."
"좋아. 그럼 네가 한평생 동굴 속에 갇혀 살아가는 죄수라고 생각해 보자. 너는 족쇄에 묶여 뒤를 볼 수는 없어. 대신 동굴 벽에 움직이는 그림자만 볼 수 있지. 그러면 넌 그림자만 보고 사니까 사람이 그림자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실제 생김새나 세상은 전혀 모르고. 그런데도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해?"
플라톤이 제시한 유명한 동굴의 우화다. 그러나 이런 예시는 너무 극단적인 설정이다. 플라톤이 뭐라 한들 세상은 대부분 보이는 그대로 아닐까? 그런데도 왜 자꾸 의심을 하지?
문제는 보이지 않는데 존재하는 것이 있다고 믿는 것에서 발생한다. 이를테면 천국과 지옥, 신, 영혼 등등
사실 보이는 대로 믿지 않는 건 인간의 특성 중 하나다. 친구나 가족이 죽었다. 이제 이 세상에 없고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 게 당연한데 그렇지 않다. 지금 내 눈에 안 보인다뿐이지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심지어 하늘나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단다.
신에 대한 믿음도 유사하다. 전 세계 인구의 70% 이상이 어떤 방식으로든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열 중 일곱은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보고 만질 수 있어서 있다고 믿는 게 아니다.
자, 보이지 않는 게 존재한다면, 보인다고 실제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이런 의심이 생긴다.
게다가 세상 만물은 시간이 지나면 쇠하고 변한다. 특히 아름다웠던 어떤 것이 변하고 추해지는 것을 보면서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없을까 생각하게 됐다. 진실된 것이라면 변하지 않아야 하고 변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선입관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존재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철학이 생겨났다. 참고로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가 참된 세계라고 주장했다.
개인의 감각은 주관적이고 오류 투성이다. 특히나 인간의 기억은 믿을만한 게 못 된다.
"안 돼! 파란 불에 건너야지!"
"엄마, 저게 어떻게 파란 불이야? 초록 불이지!"
감각의 주관적 차이는 기억의 불완전성과 결부돼 인식의 오류를 발생시킨다. 이러니 경험만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보인다고 다 믿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확산됐다.
과학도 보이는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는 믿음을 공고히 하는데 일조했다. 고대의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중세의 사람들은 둥근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스스로도 돌고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주장은 이단이었다. 근대의 사람들은 우주가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우주가 정적이라고 믿었던 아인슈타인도 허블이 발견하기 전에는 몰랐다. 30년 전만 해도 우주의 확장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런데도 보이는 그대로 믿을 수 있나?
심지어 보이는 대로 믿는 사람은 바보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냥 보기에 지구는 둥그렇지 않고 평평하다. 미국인의 2% 정도는 지구평평설을 믿고 있다는데 우리 대부분은 그런 주장을 무시한다. 우주로 나가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직접 보지도 못했으면서, 심지어 지구가 둥글다는 경험적 근거를 대지도 못 하면서.
보이지 않는 게 존재한다는 믿음도 비슷하다. 원자는 보이나? 전자는 보이나? 그럼에도 원자와 전자가 존재한다는 설명에 반대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원자와 전자의 상호작용에 기반을 둔 많은 전자장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자기파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 스마트폰이 알려준 정보를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블랙홀쯤 되면 아예 보이지 않는 게 팩트라는 역설에 직면한다. 블랙홀, 정의 자체가 빛까지 빨아들여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또 촬영한다. 보이지 않는다면서.
블랙홀 M87은 지구에서 5400만 광년 떨어져 있다고 한다. 상상도 안 되는 먼 거리의 블랙홀을 촬영하는 판국에 무엇이 진실인지는 이미 인간의 인식에서 멀어진 것 아닐까? *엄밀히 촬영이 아니라 관측한 데이터를 토대로 블랙홀 이미지를 구현한 것이다*
보이는 대로 믿지 않는 심리는 충분히 설명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무수하게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보이는 건 없고, 보이지 않는 건 있는 게 혼재하다 보니 현대 과학과 철학은 '있는 것은 정말 있느냐?'의 문제에 봉착했다. 이른바 우리의 세계가 일종의 시뮬레이션 안에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다. 또 세계가 우리의 인식 밖에 실재하는지도 의심한다. 즉, 관찰자인 인간이 죽으면 우주도 없어지는 것 아닌지 의심한다.
이런 의심들은 100% 반박하거나 해소하기 어렵다. 논리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때 이론적으로만 가능했던 화상전화기를 누구나 들고 다니고 영화처럼 자동차가 날아다니다 보니 이론적으로 가능하면 실현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반대로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실재한다는 주장은 여러 방면에서 공격받고 있다. 나는 꿈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모든 것들이 허상 아닐까? 현실이 괴롭고 불만일수록 내가 시뮬레이션 안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일종의 회피 심리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진실이 아닌 일종의 시험이며 착한 일을 많이 하거나 신을 열심히 믿으면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나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는 논리는 많은 종교에서 차용하고 있다. 다수의 무의식 속에 세계가 진짜가 아니라고 의심할 수 있는 불씨가 살아 있는 셈이다.
더욱이 양자역학의 성과들을 듣다 보면 내가 보는 세계가 진짜인지 정말 의심스럽다. 양자론은 있다와 없다의 존재론적 경계를 허물고 존재와 비존재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패러다임을 들고 나왔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있지도 없지도 않은 중첩 상태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인식 한계를 벗어난 설명이다. 그럼에도 양자이론을 토대로 양자 컴퓨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을 보면 부정할 수도 없다.
미친 과학의 세상에서 '세계가 내 의식 밖에 있는 그대로 실재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스웨덴의 이론물리학자 울프 다니엘손은 <세계 그 자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겠다.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고, 우리 머리 밖에는 수학이 존재하지 않고, 실재하는 세계는 시뮬레이션이 아니고, 컴퓨터는 생각하지 못하고, 의식은 환각이 아니고,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당연한 말을 하면서 말하기도 조심스러운 '비밀'이라고 한 이유는 명확하다. 증명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고 확실하다고 증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진실은 진실이 아니며 믿었던 사실은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도 복잡하게 생각하면 끝이 없다.
있는 게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있다와 없다도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데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못한다. 하물며 스스로 정의롭다 말하는 자를 어떻게 믿겠나?
나는 있는가? 내 의식은 환상이 아닌 진짜인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것 맞나?
남아 있는 것은 믿음뿐이다. 내가 생각한 바를 믿으며 나아갈 뿐이다.
"실재는 실재한다. 우리는 실재이며 실재를 대면할 것이다."
-울프 다니엘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