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나라의 유명한 선사 대혜종고는 죽기 직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몸을 떠나려 하니, 그 어디에 닿겠는가?”
"가는 곳이 있습니까?"
"그저 떠난다."
내가 죽고 난 다음 나에게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답할 수 없다. 죽어 본 사람이 없고 죽었다 살아났다면 죽은 것이 아니며 '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나를 포함한 누구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다른 사람이 죽고 난 다음 나에게 벌어질 일은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는 없어졌으며 그와 대화할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생각 속에서 미워하거나 그리워 할 수는 있다. 그것이 죽음이다.
물리학을 대성한 아이슈타인도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부분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그 과정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것처럼, 죽음도 마찬가지죠."
결론적으로 모른다고 답했다.
사후의 삶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예일대 철학과 교수이자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셸리 케이건은 언어유희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 모순이라고 말했다.
"죽음은 삶의 끝을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사후의 삶이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삶이 끝난 후에도 삶은 존재하는가? 라는 의미이며 그렇다면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입니다."
죽고 난 다음 영혼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영혼을 정의하기에 따라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겠지만 물리적 실체가 없고 희미하게나마 생전의 모습을 닮았으며 기억을 보존하고 주체적으로 활동가능한 어떤 것이 영혼이라면 이 질문도 대답은 '아니오'다.
왜냐하면 물리적 실체가 없으면 형태를 유지할 수 없고 기억을 보존할 수 없으며 감각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후의 삶과 같은 모순이 발생한다.
만약 물리적 실체가 없는 영혼이 보고 듣고 기억하고를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두뇌와 신경활동으로 인간의 주체적 활동을 설명하는 모델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 눈과 귀가 없는 영혼이 보고 듣는다면, 보고 듣는 행위와 감각기관은 필연적인 인과관계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눈으로 보는 것 같지만 실제 시각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은 따로 있다.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사후의 삶이나 영혼으로 이 세상을 떠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완전히 끝인가? 나도 그런 건 싫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앞서 말한 논리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꼼수는 없을까? 지금처럼 인간적이지는 않아도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기억도 사라지고 보고 듣지 못하는 상태라 할지라도 '나'라고 우길 수 있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음'은 '다음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집트의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에는 사후 세계에서 영혼이 겪는 시험과 여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몇몇 영화에서도 오마주한 마아트의 심판 장면을 보자.
죽은 자의 심장이 저울 위에 올려진다. 저울의 다른 쪽에는 진리와 정의의 깃털이 올려진다. 죽은 자의 심장은 죄의 무게를 상징하는데 깃털보다 가볍다면 그는 '다음 세계'로 나아간다. 물론 죄가 더 무거우면 괴물 아미트에게 잡아 먹혀져 영혼까지 소멸한다.
여기서 다음 세계는 이집트신 오시리스가 다스리는 세계로 '영원한 갈대밭'으로 묘사된다.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천국 같은게 아니라 영원한 갈대밭이라니.. 게다가 죽으면 다음으로 나아간다니, 형태와 상태는 달라도 '다음 장(Next Phase)'이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된다.
죽게 될 것을 생각하니 두려운가? 고통 없이 죽어도?
중세시대 사람들은 강한 기독교적 사후 세계관 덕분에 죽음을 지금보다 덜 두려워했다. 삶은 고난과 시험의 연속인 반면 사후 세계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천국이었다. 실제 흑사병이 창궐해 병자들이 죽어나갈 때조차 사람들은 죽음 자체보다 사후 심판에 대비하는 것에 더 집중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근대 이후에 더 강해졌다. 신이 죽었다, 신 같은 건 없다는 믿음이 팽배해지면서 사후세계가 불명확해지다 보니 죽음을 피하고 삶을 연장하려는 욕망이 강해진 것이다. 지금도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적다.
결국 신이나 사후세계를 절대 안 믿는 딱 나같은 부류가 죽음을 두려워할 가능성이 높다. 죽으면 끝이니까. 내가 없어지니까.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 그 불안함은 두려움으로 연결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러한 흐름이다. 죽고 난 다음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없어진다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상상할 수 없는데서 생기는 불안함과 공포!
혹자는 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데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 따라서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논변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나로선 반박할 가치도 없다. 다만 죽어있는 상태를 상상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는 말만 차용하겠다.
셸리 케이건 교수는 '죽어있는 상태'는 설명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 의미없다고 단언했다. 심지어 죽음은 어떤 상태조차 아니라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죽고 난 후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알지 못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은 허상일뿐이라고 말한다.
죽음을 부정하는 정반대의 방식도 있다. 바로 유심론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며,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물질 세계는 정신의 산물이다. 뼛속까지 유심론자라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죽음이란 물질적 신체의 소멸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소멸이 아니며 정신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믿기 나름이지만 체계의 정합성에도 불구하고 유심론적 설명만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고백하자면 나는 내가 없어지는 것이 두렵다. 내가 없다는 것이 뭔지도 모르겠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죽어 없어지는 것을 보면 꽤 높은 확률로 나도 없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무거운 사태에 직면한다.
내가 없는 미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답은 과거에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과거에 나는 확실히 없었다. 6.25 전쟁 때 나는 없었고 조선시대에 나는 없었다. 어쩌면 수억 년의 과거 시간 동안 줄기차게 나는 없었지만 그 사실에 대해 지금의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없는 미래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로마시대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도 이렇게 말했다.
"죽음이 정말 나쁜 것이라면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영겁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울해 해야 하지 않을까?"
로마시대에도 나는 없었고 그 사실이 두렵지 않다.
논리적 물리주의자 입장에서 '죽음은 완전한 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인간 인식체계의 불완전성. 언어의 한계가 생각의 한계라는 사실. 그리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도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그저' 믿는 것이다.
그러지 않을 것이라면,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나고 음악이 멈추는 것처럼 내 육신의 기능이 멈추는 날, 정신도 사라질 것이라고 두려움 없이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