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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Oct 21. 2024

다수에 끼지 않아도 틀린 게 아니다

<소셜 딜레마>

나는 회의를 싫어 한다. 정확히는 회의라는 이름을 내세운 지시 전달을 싫어한다. 

오랜 직장 생활 동안 참가자의 의견을 적절하게 공유하고 의견을 취합해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의 회의는 몇 번 겪어 보지 않았다. 내게 회의란 부장이나 국장, 사장의 편의에 따라 소집되고 일방적인 잔소리를 듣거나 내가 뭘 했으며 또 뭘 할 것인지를 보고하는 자리였다.


회의의 나쁜 점은 우선 '회의에서 결정됐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실제로는 가장 큰 권력자가 결정한 것이 분명한데도 꼭 그렇게 말한다. 


"그건 회의에서 이미 결정한 사항이잖아!"


'장'을 제외한 회의 참석자는 '장'의 의견을 경청하고 좋다며 추켜세워주거나 무시 당하거나 빼앗길 게 뻔한 아이디어를 보태는 것이 전부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참을 만하다. 그러나,


"당신도 동의한 내용이잖아. 그럴 거면 회의에서 말하지 그랬어?"


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삔이 나간다. 내가 언제 동의했나? 말해도 소용없으니 침묵했을 뿐이다. 그래 놓고 다수가 합의해서 결정했으니 따르라고 압박한다. 그놈의 다수. 도대체 '다수'가 누구란 말인가? 



"지배적인 의견은 거의 항상 보이지 않는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고, 대중의 의식 속에 심어져 확산된다."


에드워드 버네이즈는 그의 저서 '프로파간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수의 지배적인 의견이 다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생각은 희망이나 환상일 뿐이다. 보이지 않더라도 그나마 '집단'에서 만들어진다면 다행이다. 그 보이지 않는 집단의 의견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더 적은 몇몇에 의해 결정되고 결국에는 제 1 권력자의 이익을 대변할 가능성이 높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더 많은 소통이 이뤄지고 훨씬 자유롭게 다양한 의견이 취합될 것 같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를 보면 정보화사회는 '허위 정보화사회'로 변질되고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 자본주의는 '감시 자본주의'로 탈바꿈했다. 


구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의 사용자 니즈 분석은 진즉에 선을 넘었다. 그들은 사용자의 모든 활동을 추적/감시해서 빅데이터를 만들고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각 사용자를 모델링한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스포티파이] 라고 선전한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은 스포티파이보다 나를 더 잘 알지 않을까? 


인공지능이 모델링한 '나'는 신기술 콘텐츠를 좋아하고 다양한 색채가 있는 디자인에 '좋아요'를 누르며 간편하고 칼로리 낮은 음식을 선호한다. 나를 완벽하게 파악한 인공지능은 하나의 콘텐츠 다음 어떤 콘텐츠를 노출하면 망설임 없이 재생 버튼을 누르며 이용 중인 플랫폼을 이탈하지 않을지 확률적으로 계산한다.


그들의 1차 목표는 그나마 순박하다. 나의 관심을 광고주에게 팔아 넘기는 것. 내가 유뷰트 영상을 무료로 보고 있으니 그 정도는 당해줄 만한다. 하지만 나의 관심이 특정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면? 그로 인해 내 선택이 달라진다면? 그러면서도 내 선택이라고 믿게 만든다면?  이야기가 아주 달라진다. 


<소셜 딜레마>를 보면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취약한지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우리가 마술에 얼마나 잘 속는지만 봐도 알 수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마술사의 요란한 손동작에 현혹돼 바로 눈앞에서 소매에 매달린 흰색 공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자주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작된 결정을 따르고 있다.”


에드워드 버네이즈는 소수의 권력자가 조작하는 여론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동하는지 논리적으로 증명했다. 신문과 방송, 플랫카드 등 전통적 미디어를 이용한 선전만으로도 가능하던 여론 조작이 소셜 미디어의 폭발적 성장으로 더욱 과학적으로 진화했다.      


유튜브든 페이스북이든 내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집중적으로 노출한다. 그래야 플랫폼에 오래 붙잡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성향도 그렇다. 우파 콘텐츠를 보면 우파 지지 영상을, 좌파 콘텐츠를 보면 좌파 지지 영상을 노출해 정치적 성향을 더욱 분극화 시킨다. 자기 홈화면에 늘 비슷한 성향의  콘텐츠만 노출되니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저렇게 한심하지? 바보인가? 미친 건가? 한 패인가?'


스스로 선택해서 콘텐츠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제한된 카테고리 안에서 선택할 뿐이다. 자유의지로 선택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쉽게 빠져들고 자기가 변질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런 방식으로 힘 있는 소수가 다수를 조작하고 지배한다. 이쯤되면 조작된 다수가 내린 결론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수의 억압과 폭력에 굴복해야 한다. 아니면 침묵하거나. 


엄밀히 말해 문명사회에서 '다수'가 직접 개인을 억압하지는 않는다. 대신 다수결에 따라 권한을 위임 받은 정부의 공권력이 대리 집행한다. 다수결 자체의 정당성에도 문제가 있지만 공권력을 집행하는 공무원 개인의 공정성에도 의문이 든다. 검찰에 대한 불신이 대표적인 사례다.


다수결이 정당했는지, 다수결을 집행하는 자가 공정한지, 2번의 왜곡을 거치면서 최종 결과물은 우리가 원했던 모습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라고 누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천 명의 사람이 있으면 천 개의 다른 진실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현실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다수결이라는 룰을 만들었다. 그러나 다수를 조종하는 소수의 권력자가 있다. 다수결이 다수결이 아니다. 더구나 집행자 역시 완전히 공정할 수 없다. 아무리 공정해도 누군가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정말 힘 없는 소수는 아무런 의견도 내지 못한다. 이들을 대신해서 의견을 내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도덕성이 문제가 된다. 이 사람을 믿어도 되는지, 다른 속내는 없는지. 그러나 힘 없는 소수는 이를 분간할 여력도 없다.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은 또 힘 있는 사람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유사한 딜레마는 끝없이 있다. 실제 벌어지는 일들이다. '국민을 위해' 뭘 하겠다는 정치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모두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뿐이다. 이익에 편승하거나 관망하면서 필요할 때만 '다수'라는 명분을 세운다. 그래서 힘 없는 소수는 '다수결'이 폭력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것을 말할 권리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걸겠다"


이브린 비어트리체 홀은 볼테르의 철학적 신념을 이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다양한 의견이 보장되지 않는 다수결은 폭력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독일의 나치당이 다수결을 따르지 않아서 그 많은 폭압을 저질렀나? 천 명이 모여 하나의 의견만을 낸다면 다수결이 필요없고, 하나의 의견으로 취합하자고 다수결을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어떤 것을 결정할 때 천 명 만큼 다양한 의견을 듣고자 하는 것이 다수결의 취지다.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려면 다양한 취향과 감성이 선행돼야 한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취향과 감성도 몇 가지 주도적인 트렌드에 쏠리고 있다. 콘텐츠는 매일 수억 개씩 업데이트 되지만 팔리는 영상, 팔리는 음악, 팔리는 그림, 팔리는 글 등은 딱 정해져 있다. 나머지는 모두 힘없는 소수로 전락한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똑같이 좋아해야만 소통하고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나도 가봤어, 나도 먹어봤어, 나도 샀어, 그러니까 '좋아요'를 눌러줘. 나도 '좋아요' 당하고 싶어! 


다수의 폭력은 정치 사회 분야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문화 예술 영역에서도 다수의 트렌드에 합류하지 못하면 소수로서의 절망을 견뎌야 한다. 남들이 관심 갖지 않는 것을 좋아해도 문제고, 그것을 창작한다면 더 큰 문제다. 당신은 소수고, 소수이기에 '네가 틀렸다'는 비판을 감내해야 한다. 


"Nothing vast enters the life of mortals without a curse."  


위대한 일은 항상 저주를 동반한다. 소포클레스가 기원전에 했던 말이 예언처럼 실현되고 있다. 전 세계를 하나로 묶어준 디지털 신세계가 정말 우리를 '하나'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수십 억명이 하나가 되는 것은 분명히 저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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