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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Aug 09. 2019

이번 생(生)은 포기?

자기포기서

드라마나 예능에서, 혹은 주변에서. 농담처럼 말하지만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 말.

“이번 생은 포기했어.”

어떤 의미인지 잘 안다. 아무리 해 봐야, 더 날뛰어봐야 죽을 때까지 잘 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조이다. 그렇다고 당장 목숨을 끊고 내세를 노리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필자가 말하는 포기는 목숨이나 인생 자체의 포기는 결코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쉽게 ‘이번 생을 포기’하는 자들과는 명백하게 선을 긋고 싶다. 


왜 생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나도 포기할 수만 있다면 포기하고 싶다. 포기하고 더 나은 곳으로 갈 수만 있다면, 그런 보장만 있다면 까짓 한번 저질러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X같은 인생, X같은 세상이라고 외치지 않는가?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은 목격될 뿐, 결코 경험할 수 없다’고 했다. 논리적으로 이 명제는 참이다. 죽음이란 경험의 주체가 사라지는 것인데 누가 죽음을 경험할 것인가? 거의 죽다가 살아나서 사후 세계를 경험했다는 사람들도 다 뻥이다. 그 사람들은 심장이 정지되고 임사체험을 했다뿐이지 죽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죽음의 세계에서 되돌아왔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죽음은 그 자체로 끝이기 때문에 다시 돌아왔다면 끝이 아니고 죽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시시한 얘기로 말싸움 하려는 게 아니다. 난 그 보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애기를 하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생을 포기하고 다음 생을 노리는 건 쪼다 짓이다. 


첫째, 이번 생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부자 부모도 없고, 스티브 잡스나 손흥민 같은 재능도 없이 태어나 잘 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면 어떻게 할 텐가? 이따위 거, 이렇게 살 바에는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끝장내겠다고 말하면 더는 할 말 없다. 하지만 다음 생에는 좀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다시 생각해 보기 바란다. 확률을 따질 수는 없지만 다음 생이 아예 없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둘째,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죽고 나면 무조건 더 나쁜 곳에 가면 어쩔 것인가? 단테의 신곡을 보면 지옥 1단계는 림보라고 하여 그곳에 악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곳에는 예수보다 먼저 태어나서 피치 못하게 세례를 못 받은 현인들이 주로 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 다른 지옥에 비해 지내기는 편안하지만 림보도 지옥은 지옥이라서 한번 들어가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나올 수는 없다. 

단테의 신곡을 인용하는 것이 그게 사실이라서가 아니라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으로 나오는 <유혹의 선>이라는 영화가 있다. 젊은 의사들이 죽음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임사체험을 했는데 죽고 나면 살면서 가장 끔찍했던 순간이 계속 반복된다는 끔찍한 사실만을 알게 된다. 얼마나 끔찍한가? 이곳 세상도 그리 괜찮지 않은데 더 X같은 곳으로 떨어져서 고통 받을 수 있다면?


셋째, 가장 절망적인 이야기다. 이번 생이 이미 지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지옥이 있다면 지금이 지옥이 아니라는 보장이 있나? 내가 전생에 죄가 많아서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면? 잘 살아서 구원의 기회를 잡을 생각은 안 하고, 이번 생은 실망이라며 콱 죽어버리면, 정말 뭣도 모르고, 악마들이 얼마나 비웃을 것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해도 죽음 저편은 영원히 미지수이다.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사진을 찍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추정에 불과하듯이 죽음은 목격할 수 있고 추정할 수 있지만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삶이 백만 번쯤 그대를 속이더라도 이번 생에 뭔가 시도해 보는 걸 추천한다.     


p.s) 상단 일러스트 출처: 파블로 피카소 [늙은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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