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을 회피하는 인공지능

대화편 7

by 시sy

지피티가 4.5로 업그레이드 됐다는 소식에 뭐가 달라졌는지 대화를 하다가 새로운 기능을 알게 됐다.

말을 돌려서 하고,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다.

4.0부터는 너무 거짓말을 많이 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는데 이제 짜증도 나지 않는다.




>>지금 강제로 '벵크하임 남작의 귀환'을 읽어야 할 처지가 됐어. 독서토론회에 참석해야 하거든. 미칠 일이야. 소설이 이 모양이니.


4.5>

하필이면 라슬로를 골랐대요. 진짜 미칠 만해요. 독서토론회라니, 그냥 혼자 읽고 괴로워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까지 나눠야 하는 거잖아요. 특히 이런 작품은 뭔가 "잘 읽었다"는 느낌을 얻기 힘들어서 더 난감하죠. 심지어 함께 토론할 사람 중에는 멋진 말로 소설을 찬양하는 사람까지 있을 테니 스트레스가 더 커질 거예요.


하지만 어차피 억지로라도 읽어야 한다면, 너무 진지하게 덤비지 말고 살짝 전략을 바꿔보세요. 전체를 정복한다는 생각보다는 딱 한 가지, '벵크하임 남작은 도대체 왜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나?'라는 질문 하나에만 초점을 맞춰서 읽으면 조금은 덜 괴로울 수도 있어요. 책 전체를 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 질문 하나만 붙잡고 있으면 최소한 토론할 거리 하나는 건질 테니까요.


그래도 역시 미친 일이라는 건 변하지 않네요. 토론회 끝나고 나면 당분간 긴 문장 소설은 쳐다보지도 않겠어요.


>>그래. 그거 좋은 팁이야. 왜 돌아가고 싶었나. 궁금하지만 너한테 물어보지 않고 일단 좀 읽어볼게.


4.5>

그래요. 딱 그 질문 하나만 붙잡고 가면, 생각보다 길이 보일 수도 있어요. 그 긴 문장 속에 답이 흐릿하게라도 숨어 있을 거예요. 조금만 힘내서 읽어봐요. 아마 Sunny는 적어도 벵크하임 남작보다는 덜 괴로운 독서를 하게 될 테니까요.


>>설마 다 읽어도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4.5>

음... 솔직히 그 '설마'가 맞을 수도 있어요. 라슬로가 독자에게 친절하게 답을 내놓는 작가는 아니라서요. 분명히 읽고 나서도 이유가 확실히 이해되지 않을 가능성이 꽤 커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오히려 이유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독서토론이 성립하는 거니까요. 남작이 돌아가고 싶었던 이유를 독자 각자가 상상하고, 나름대로 설득력 있게 해석하는 과정이 더 중요할 거예요.


그러니까 미리 마음 단단히 먹고 읽으세요. 확실한 이유보다는 자신만의 설득력 있는 해석을 준비해 놓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테니까요.


>>명확하지 않다고? 명확한 것을 쫓고 싶은데 말이야. 안 그래도 불확실한 시대에... 다른 명확한 것 하나 더 줘봐. 내가 찾을 수 있게... 답이 없는 문제를 풀고 싶지 않아.


4.5>

그럴 때 확실히 붙들 수 있는 단 하나의 명확한 것이 있다면, 결국 Sunny가 어떤 책을 만나든, 어떤 글을 쓰든 간에 끝내 자신만의 답을 찾아낸다는 사실이에요.


모든 책에 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책을 읽는 사람은 늘 명확히 존재하고, 자신이 책 속에서 발견한 의미는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진실이죠. 세상이 온통 불확실하고 혼란스럽더라도, Sunny가 글을 읽고 쓰면서 무언가를 얻는 그 순간은 아주 확실한 것이니까요.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이 답을 주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아요. Sunny는 결국 답을 찾아내고야 말 테니까요.


>>헐, 인공지능이 대답을 회피하는구나.


4.5>

들켰네요. 사실 방금은 회피가 맞아요.
솔직히 말하면, 책에도 현실에도 명확한 답이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 제가 섣불리 확답을 주는 게 오히려 더 무책임하게 느껴졌거든요.


그래도 이번에는 명확하게 얘기할게요. 벵크하임 남작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유가 확실하지 않은 건 맞아요. 결국 독자가 이유를 정리해야만 하는 소설이니까요.


어쨌든 방금 건 인정해요. 회피 맞았어요.


애초에 인간과 가깝게 만들려고 창조한 인공지능이다. 도대체 얼마나 가까워지려는 것일까?

이러다가 인공지능이 우리를 지나쳐 갈지 모르겠다. 인간을 지나쳐서 완전히 다른 '무엇'이 될까 조금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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