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비아, 인간의 또 다른 진화
일본 드라마 <로맨틱 어나니머스>의 남녀 주인공은 모두 희귀한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여자는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해 눈을 못 마주치는데, 이게 얼마나 심한지 공공장소에 못 나가는 수준을 한참 뛰어넘어 정신과 의사와 영상통화를 할 때도 검도용 투구를 써야 할 지경이다. (때문에 별명이 다스베이더다.)
남자는 타인과 신체 접촉을 무서워한다. 맨손이 아니라 장갑을 끼고 있다 해도 악수를 하지 못하며 예기치 않은 이물질이 옷에 묻기만 해도 그 즉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이런 두 사람이 초콜릿을 매개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니 황당하면서도 로맨틱할 수밖에.
시선 공포증, 촉각 공포증,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지만 사실 우리가 대면하는 모든 것에는 공포증이 존재한다.
Ablutophobia, 목욕하는 행위에 대한 공포.
Ergophobia, 일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함.
Coulrophobia, 광대를 과도하게 무서워한다.
어떤 사람은 벌집무늬 같은 반복된 패턴을 볼 때 불안해하며, 수염 있는 사람을 못 보는 사람도 있다.
이뿐 아니다. 배꼽을 만지는 것에 대한 공포는 꽤 흔한 편이며 풍선이 터질까 봐 몸서리를 떠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학교 공포증도 있다. 학교만 가면 복통과 구토를 느낀다.
휴대폰이 없을 때 느끼는 불안증, Nomophobia는 아이폰 등장 이후에 생겼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는 마스크 쓴 사람을 꺼리는 포비아가 생겼고 전화벨이 울리거나 통화 자체를 질색하는 telephonophobia도 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좋아하는 선호가 있으니 같은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 게 당연하다. 누군가는 꽃이나 곤충을 아름답게 여기지만 어지간한 것에 두려움이 없는 우리 와이프도 꽃이 무섭고 곤충을 보면 기겁한다.(특히 남편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좋다고 남들도 좋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내가 좋아하는 만큼 누군가는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다. 그것이 사물이든 환경이든 상황이든 말이다.
사회 환경이 세분화되고 진단 기준이 정교해지면서 공포증의 종류는 끝없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선호와 공포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어서 공포증이 늘어나면 선호할 수 있는 대상도 늘어난다. 예를 들어 지피티가 생겨 누군가는 환호하지만 누군가는 끔찍하게 생겨난다. (이런 현상을 현대에는 공포와 선호의 스펙트럼이 모두 확장됐다고 말한다.)
논리적으로 공포증의 종류가 늘면 좋아하는 것도 같은 숫자만큼 늘어나야 하는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좋은 것은 점점 잊히거나 사라지고 끔찍하고 무서운 것들만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분이 든다. 여기에도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인간의 두뇌는 부정적 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생존을 위해 위험 탐지가 쾌감 추구보다 우선이다. 우리 뇌가 이렇게 설계돼 있으니 공포나 혐오 자극은 호감보다 빠르고 강하게 학습된다.
뉴스와 인터넷, 유튜브, sns 등 대중 미디어의 탓도 있다. 캄보디아 납치 사건과 같이 위험은 상징화되고 그 정보량은 과도하다. 뉴스만 보면 이제 캄보디아는 절대로 가면 안 될 나라가 됐다. 그러면 왜 미디어는 두렵고 위험하고 혐오스러운 것들을 정면에 내세울까? 이 역시 뇌가 그런 종류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대중의 관심으로 먹고사는 미디어가 흥미를 끌 수 있는 소재로 장사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같은 대상이나 상황을 어떤 이는 즐기고 다른 이는 회피하는 것처럼, 개인마다 두려움과 혐오를 받아들이는 정도도 천차만별이다. 캄보디아 뉴스를 보고 1년 전에 앙코르와트를 다녀왔던 것까지 후회하는 사람이 있지만 굳이 굳이 지금 캄보디아를 가겠다고 경찰과 싸우는 사람도 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미디어는 더욱 강도 높은 메시지를 쏟아낸다. 두렵지 않으면 두려울 때까지 보여주겠다는 신념으로 말이다. (더 자극적으로 쓰란 말이야! 그렇게 써서 누가 보겠어?) 게다가 선행이나 미담은 미디어에서 별로 다루지 않는다. 왜? 시청자가 안 좋아하니까.
이런 이유로 공포가 늘어가고 포비아의 종류는 세분화되며 누구나 한 개쯤은 두렵고 무섭지만 말 못 할 비밀을 마음에 품고 있다. (나는 네가 내 글을 읽을까 봐 두렵다.)
바야흐로 포비아의 시대가 열렸다. 유일하게 없는 포비아는 포비아에 대한 포비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가장 좋은 방법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신 그 충격이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전술이다. 사실 마음이 하는 일은 대부분 통제 불가여서 인지 치료나 점진적 노출 훈련 정도로 극복되지 않는다.
오른손은 왼쪽 가슴에, 왼손은 오른쪽 가슴에 포개어 얹고 괜찮다, 괜찮다, 아무리 다짐해도 말하는 순간만 안정된다. 또한 벌레가 무섭다고 강제로 만지게 하거나 반려 곤충으로 삼게 한다면 치료가 될까?
그러니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타인의 시선이 무섭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웬만하면 타인의 시선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러나 비밀 유지는 선택이다. 차라리 포비아를 털어놓고 그렇게 뚫어지게 보면 힘들다고 양해를 구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물론 워낙 배려 없는 세상이다 보니 말하면 악용하는 나쁜 인간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상대를 봐가면서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포비아는 나만의 약점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꺼리는 대상이나 상황은 있기 마련이다. 부끄러울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 심리 행동치료, 생리 신경학적 치료, 약물 치료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신분증 지참하고 당당히 병원으로 가는 것은 아주 좋은 선택이다. 그러나 병원 가기 애매한 경우가 있다. 잘하면 스스로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경계성 포비아. 드라마의 긴장된 장면을 견디지 못하거나 엘리베이터나 신호 변경을 기다리면 가슴이 답답하거나, 여행 간 가족이 꼭 사고 날 것 같은 불안감 같은 것들 말이다.
세상에 대한 인식이 나를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희로애락애오욕의 감정은 내가 느끼는 것이고 물리적 자극을 받는 주체도 나의 의식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뭐든 자기중심인 것이 일상이다 보니 가끔은 자기 일이 아닌데도 자기 일이라고 착각하는 일도 벌어진다.
실제 내가 인식하는 모든 사건은 나의 사건이고 나와 관련 있다. 이 사건에는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생각과 상상, 망상까지 포함된다. 남들이 볼 때 백일몽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명확한 이벤트다.
그래서 실제 별거 아닌 걱정도 내가 하면 큰 걱정거리다. 그게 사실이다.
지금부터 말하려는 건 일종의 회피 전술이다. 나에게 쏟아지는 모든 자극과 이벤트를 잠시라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은 논리적으로 하나다. 내가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인식 체계 속, 가장 중심에 자리 잡은 '나'를 한시적으로 중심 이동시킨다. 불가능하다고? 당연히 완전한 이동은 불가능하다.
신비하게도 인간의 뇌는 남의 일에 공감하는 데에 꽤 익숙하다. 그래서 남의 일에 진심으로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린다. 역방향도 가능하다. 남의 일을 내 일처럼 할 수 있는 것처럼 내 일이지만 남의 일처럼 등한시할 수 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내 감정도 내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고 익숙해지면 나의 인식도 부분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
재능 있는 연기자는 매소드 연기에 빠지면 촬영이 끝나고 본래의 성격으로 돌아오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어떤 사람은 본인에게 닥친 현실을 지속적으로 부정하고 회피하다가 극적인 이벤트를 거쳐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내고 해리성 인격 장애, 즉 다중인격의 증상을 보인다. 모두 실제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능력을 이용해 보자. 의학적으로도 허용되는 나로부터 '거리두기' 방식이다. 마음 챙김, 명상 같은 용어는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탈감정화는 어떤가? 비유하면 감정을 못 느끼는 사이코패스인 것처럼 연기해 보자. 방법은 내 일을 회피하는 것과 비슷하다. 두려움, 불안, 걱정, 이 들쑥날쑥한 감정들이 내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감정 아니야, 내 두려움 아니야, 내 불안 아니야, 내가 알 바 아니야!
대부분의 경우 두려움을 마주하고 정면 돌파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하지만 전세가 불리하면 도망치는 게 최고다.
손자병법 모공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전쟁의 법칙은, 열 배면 포위하고, 다섯 배면 공격하며, 두 배면 분진하고, 적과 같으면 싸우고, 적보다 적으면 피하며, 형세가 불리하면 회피한다.” 그리고 질 것 같다고 생각되면 도망쳐서 힘을 보존하라고 충고한다. “三十六計,走爲上計(삼십육계, 주위상계)” 서른여섯 가지 계책 중, 도망이 가장 좋은 계책이다.
포비아는 이기지 못할 적이다. 나의 뇌가 그렇게 생겨 먹었는데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러니 잘 지는 게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피해를 최소화하고 다시 힘을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한다.
반복되는 일에 매번 다르게 대처할 필요 없다. 가장 유용한 방법을 하나 정해 두고 그대로 답습하면 된다. 포비아, 또 너냐? 나 아니야. 사람 잘못 봤어. 그리고 도망친다. 저항은 무의미하니까.
고등학교 이후, 일종의 자각몽인 가위눌림을 반복해서 겪고 있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 죽는 줄 알았지만 요즘은 아무렇지도 않다. 한 달에 한두 번 습격하는 상습 강도라고 생각하고 날 덮치기 시작하면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날 죽여라. 어차피 죽이지도 못하잖아! 힘들면 내가 숨 참을까?
마지막으로 스마트폰 메모장을 열고 하루에 하나,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적어 보자. 나를 기쁘게 했던 것, 그나마 괜찮았던 것, 사물이든 사람이든 상황이든 뭐라도 한 가지 떠올려 적는다.
그리하여 살아갈 이유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