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못 자서 잠이 덜 깬 아침을 생각하자. 간단히 씻어 몸 상태를 개운하게 바꾸고 편한 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뒤집어쓴다. 그리고 적당한 비트의 편안한 음악을 듣는다.
이제 음악이 아닌 것을 하나씩 버린다.
먼저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다음 내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향할 것인지도 잊는다.
뭘 하려 했더라? 떠올리지 않는다. 숨을 쉬고 있지만 굳이 마시고 내쉬지 않는다. 멈춘 것 같아도 내버려 둔다.
마침내 귀에 울리는 음악이 내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음악과 나는 분리돼 있다. 내 경험과 나를 분리한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드디어 존재가 흐릿해진다.
'하여 나란, 나의 존재란, ' 모르겠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 생각이 멈춘다.
분명한 것 한 가지. 나의 존재는 내 경험의 흐름일 뿐이다.
하나 더, 자아를 의식하는 것도 경험의 하나다. 내적 경험.
결론, 경험이 끝나면 나는 사라진다. 죽음이다.
어머니가 위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삶에서 조금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여타 주변의 다른 일들처럼.
최근 들어 삶과 나를 이어주는 가느다란 끈이 길게 늘어지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내 삶도 이리 별거 아닌데 나 아닌 무엇을 걱정하랴. 나도 존재하지 않는데 내 걱정이 무슨 소용이랴. 그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나는 내 삶이 더 이상 애틋하지 않다. 내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하물며 남들의 삶이야. 부모든 가족이든 결국 나의 경험일 뿐이다. 그런 경험들과 나를 분리할 수 있다면, 불가능하겠지? 그 경험이 곧 나이니까.
나는 그저 무료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해야 할 것도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없는 지루한 삶. 생각나면 글을 쓰고 나머지는 하늘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의미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도 하고 싶지 않다.
비로소 죽기 전에 자기가 쓴 소설을 모두 불태워 달라고 했던 프란츠 카프카를 이해한다. 내가 차라리 벌레였으면 누구도 이해 못 하는 것을 이해할 텐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려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제 믿는다. 바람직한 일이다. 빠릿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뭔가 되고자 하는 것도, 뭔가 되는 것도 모두 바보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나의 인식이 지금의 반만 되었더라도 이 세상은 좀 더 살기 편했으리라.
모든 것을 의심하는 나는 어떤 것도 쉽게 믿지 못하며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뭔가 이룬다는 것은 그 외 다른 것을 버린다는 것이다. 확신이 있지 않고서야 그런 선택이 가능할 리 없다. 그런데 어떻게 확신하나? 확신만큼 위험한 것이 있나?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운명론자가 된 지 오래다. 이리되려고 그랬던 것이구나. 모든 것을 결과론적으로 해석한다. 내가 보는 것은 오직 결과일 뿐, 이유를 짐작할 수 없다. 나는 또 어찌 될 것인가? 궁금하지만 집착하지 않는다. 결국 알게 될 테니. 그때는 결코 놀라거나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마음을 단단하게 고정한다.
이제 생일이 되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도 네이버와 카카오가 축하해 주는 시대가 됐다. 그것이면 족하지 않나? 다른 축하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겨우 삶을 지탱하고 있을 뿐인데, 이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이 축하받을 일인가?
어떤 빛은 창문의 부서진 틈으로 스며든다. 그 틈으로 쏟아진 빛에 눈이 부실 날도 생길 것이다.
막연히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나? 겸허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운명을 경험한다.
오늘의 실수 하나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오늘의 불운 하나를 웃어넘긴다.
오늘의 귀찮은 일 하나를 해치우고, 내킨다면 누군가를 도와도 좋다. 그리고 작은 행운에 몹시 기뻐한다.
그럼에도 나의 선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