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들었지? 아는 노래인데..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대 마음에 다다르는 길
찾을 수 있을까 언제나 멀리 있는 그대
기다려줘 기다려줘
내가 그대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김광석의 '기다려줘'
과거 어느 때 그가 말했다. 자신의 소망은 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라고. 그는 내가 그런 사람이기를 바랐겠지만, 난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너를 이해하겠니?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때 이미 철학적 회의에 빠져 있었던 나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봐야 해. 그의 피부 안으로 들어가 걸어 다녀봐야 한다.”
<앵무새 죽이기>
인간은 경험, 감정, 인지 구조가 다 다르고,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나는 건 일부에 불과하다. 따라서 비슷하게 공감하거나 추측할 수는 있어도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이런 공식은 스스로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나'라는 인간의 의식 구조는 너무 복잡해서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 편향, 감정 왜곡이 존재한다. 게다가 자아는 계속 변하고 인식은 제한적이다. 어떤 면에서 스스로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관은 타인이 대상일 때보다 심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완전히 이해할까?
딜레마가 생긴다. 너를 이해 못 하고, 나조차 내 마음을 모르는데 어떻게 소통을 할까?
쉬운 답이 있다. 100% 소통은 하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소통하고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함께 사는데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맞다. 언어나 행동은 신호일뿐이고, 우리는 그걸 해석해서 어느 정도 일치하는 의미를 구성한다. 그래서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소통은 오해를 전제한다. 100%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90을 이해하면 이해 못 한 10이 남고, 60을 이해하면 40이 남는다. 이렇게 남겨지는 미지의 의미 덩어리가 모여 오해를 구성한다.
보통은 이해하지 못하고 남겨진 의미를 기억에서 지우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한 상황이 되면 80을 이해해도 이해하지 못한 20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합의를 시도한다.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20을 서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대부분 실패한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나에게도 사정이 있으니 좀 넘어가 달라는 거지."
"뭘 넘어가? 뭔지 알아야 넘어가지. 넌 툭하면 어물쩡 넘어가려고 하더라."
"내가 언제 어물쩍 넘어갔다고 그래? 그러는 너는, 한 번이라도 날 이해한 적 있어? 이해하려고 노력해 봤냐고! 매번 죽일 듯 달려들기나 하지."
"그래서 내가 문제라는 거지? 너는 아무 잘못 없고 전부 내 잘못이다?"
그저 의사소통 실패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이런 실패는 더 큰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그 나머지 20이 열 배로 커지면서 모든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최근에 아내가 말했다.
"넌 참 다른 사람이더라. 그래서 그냥 다른 것을 인정하기로 했어."
고마운 말이지만 조금은 섭섭했다. 아직도 나를 이렇게나 몰랐다니.
매일 대화하는 친구, 그런 친구 같은 아내, 수십 년을 함께하며 같이 나눈 대화를 책으로 만든다면 대학 도서관을 가득 채울 것 같은데,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 모르는 것이 많고 매일 이해하려 애쓴다. 왜 그럴까?
그건 이해하는 것만큼 오해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아예 모르는 사람은 오해할 것도 없다. 편견도 없다. 하지만 10년을 알았으면 10년만큼의 오해가 누적되고 20년을 알고 지내면 20년의 무게만큼 오해가 쌓인다.
그러니 깊이 사귄 친구, 오래 만난 사이일수록 그 관계는 더욱 위태하다. 제대로 소통하지 않고 그저 묻어둔 오해의 더미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오면 그다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히말라야 산맥의 만년설이 눈사태로 쏟아져 내리는 것과 비슷하다.
사건에 대한 인식, 타인에 대한 인식, 심지어 스스로에 대한 인식도 부족한 데다 일상 언어의 의미 전달력은 한계가 명확하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이해하라니.. 어떻게?
어쩌면 이해는 불필요한지 모른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이해'를 하려는 것이 오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용이다. 상대의 처지와 논리를 억지로 이해하지 말고 가감 없이 수용하는 것이다. 이해되면 이해하고 안 되면 수용한다. 그것이 관계를 이어가고 갈등을 피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수용은 너무 딱딱하다.
"너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냥 수용할게. 마음대로 말해. 다 수용할게."
이렇게 말하면 누가 좋아하겠나? 그래서 필요한 것이 위장이다. 이해하는 척 위장!
사실 말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해하는 척'하고 산다. 당신 주변을 둘러봐라. 누가 당신을 진짜 이해하는지. 당신이 어려운 사람일수록, 또 중요한 인물일수록 사람들은 당신을 이해하는 척한다. 반면 만만한 사람에게는 그런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반대로 윽박지른다. '네가 나를 이해해! 내가 갑이잖아!'
나는 사실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그것은 최소한 내 의견을 수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알고 있다. 당신은 절대 날 이해 못 해. 그렇지만 당신은 나를 이해하는 척할 수 있는 배려심을 가지고 있어. 나는 그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그래서 나도 당신을 이해하는 척할 게.
'기다려줘 기다려줘 내가 그대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노래는 결국 수용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의 마음에 다다르는 길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해 못 한다. 하지만 방법을 찾겠다. 당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달라.
그렇다. 우리는 이해를 바라지 말고 타인이 나를 수용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를 가져야 한다. 수용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내 가치관에 맞지 않는 상대의 태도를 마음속에 구겨 넣는 일이 어찌 쉽겠나?
“어떤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를 바보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칼 융
나를 이해 못 한다고 그가 바보는 아니다. 나를 이해하기 바라는 내가 바보다. 그러니 이해 말고 수용을, 그렇지만 수용한다 말하지 말고 '이해하는 척'해주길 당신에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