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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는 세상에 대하여

노래가 끝나면 음악은 사라진다.

by 시sy

기타는 있어도 기타 소리는 없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존재에 층위가 있다면 기타의 존재와 기타 소리의 존재는 층위가 다르다.

기타는 나무, 금속, 줄로 이루어진 물체이기에 그 자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소리는 기타라는 물체가 공기를 진동시킬 때 생겨나는 현상일 뿐이다. 즉, 기타는 존재하지만 기타 소리는 기타와 연주자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사건(event) 같은 것이다.

철학적으로 따지면, 기타 소리는 물리적 진동 그 자체라기보다 우리 뇌가 해석한 경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 기타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공기의 압력 변동일뿐인데, 인간이 그걸 멜로디라고 인식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기타는 존재하지만 기타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타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인식 속에만 존재한다.


오랫동안 나의 의문은 이런 것이다.

내가 있는데 어떻게 없어지나.

죽고 나면 의식하는 자아가 없어지는 것인데 내가 없는 세상은 두려움을 넘어 상상할 수 없다. 어떻게 있는 게 없어지지?

그래서 생각을 바꿔 보기로 했다. 있는 게 없어지지 않는다면, 원래 없는 게 아닐까?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의식'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존재하지도 않는 자아에 매달려 집착하고 괴로워하고 욕심을 부려왔던 것이 아닐까?


있다, 없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용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니 이 모든 사변이 말장난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치부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정답이다.


“죽음은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우리가 죽어있을 땐 우리가 없고, 우리가 있을 땐 죽음이 없다”


몽테뉴의 멋진 말이다. 이와 비슷한 명언은 수없이 많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라고 말했고, 카뮈는 "죽음을 통해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라."라고 충고했다.

다 좋다. 하지만 그럼에도 생각난다면?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다면? 게다가 내가 없는 세상이 뭔지 모르겠고 두렵다면? 그럴 수 있지 않나?


많은 뇌과학자들이 의식을 "오케스트라의 화음"에 비유한다.

뇌 속에서 수많은 신경세포들이 제각기 역할을 하면서 하나의 통합된 경험을 만들어내는데 그게 바로 인간의 의식이라는 발상이다. 바이올린, 첼로, 타악기, 플루트, 각각 혼자 연주하면 각자의 소리일 뿐이지만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 연주하면 하나의 곡이 된다.

뇌도 마찬가지다. 시각 피질은 이미지, 청각 피질은 소리, 전두엽은 판단, 편도체는 감정, 모두 따로따로 신호를 보내지만 나에게는 "지금 여기서 커피 마시고 있네”라는 하나의 경험으로 들린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하던 베토벤 교향곡 <운명>이 끝나고 모든 단원들이 뿔뿔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그들이 만들어낸 화음은 청중의 감성에 남을지언정 음악당에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노래가 끝나서 음악이 사라진 것이다. 원래 없던 것처럼.


그러면 나는, 내가 나라고 의식하는 자아는 육체라는 오케스트라가 연주 중일 때만 존재하는 이벤트이고 현상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슬프고도 아름답다. 내가 선율이라니.


그래서 곰곰이 생각한다. 나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책상 밑으로 뻗어 있는 내 발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옆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있다고 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나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처럼 우주의 어느 구석을 떠돌고 있는 구슬 같은 것이 아닐까?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의식으로 생성해 내지만 실제 모나드 밖의 타자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이 세상에 존재의 자국을 남가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해진다. 원래 없던 것이니 죽고 나서 없다고 해서 아쉬울 것은 없다. 두려움도 없다. 그러면 된 것일까? 그냥 말장난에 스스로 위안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의식이 오케스트라의 화음이라고 주장하는 뇌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은 남아 있다.

“그 화음을 누가 지휘하느냐?”

만약 지휘자가 있다면 그 지휘자야 말로 자아의 정수, 의지의 집합체, 바로 '나'라고 칭할 수 있다. 그런데 없다면? 그냥 모든 악기가 서로 맞추면서 자연스럽게 화음을 만들어낸다면?


음악당에 홀로 남아 다음 연주회를 준비하는 지휘자마저 없다면 나는 없다. 내가 느끼는 경험만이 존재한다. 내가 붙잡고 싶은 '실체적 자아'는 애초에 없고, 오직 경험의 흐름만 있을 뿐이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마치 공연이 끝난 무대에 배우들이 여전히 있을 거라 믿는 거랑 비슷하다.


연주가 끝나고 무대의 조명마저 꺼진다. 음악은 사라지고 내 존재가 희미해진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없는 나는 무언가에 집착하고, 표현하고,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결국 삶을 살아간다.

나는 매 순간 새로 생겨나는 즉흥곡을 연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집중을 풀면 다른 곡으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에 대한 집작 자체가 가장 인간적인 음악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걱정하는 그대, 이제 평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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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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