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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죽지 않는 것만으로 살 수 없다.

by 시sy

"당신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러면 하지 마."

"부탁이 있어."

"말해. 부탁이니까 들어줄지 말지는 내 마음이야."

"이제 날 보내줘. 이런 식으로 삶을 연명하는 게 너무 힘들어. 지겹고. 약에 취해 있는 것 빼면 맨 정신으로 있는 건 하루에 두 시간도 안 되는 것 같아. 무슨 말인지 알지?"

"나도 미안하지만, 나는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당신이 있는 게 좋아. 이렇게 말도 할 수 있고. 당신이 완전히 없어져 만나지도 못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면 미쳐버릴 거야. 죽을지도 몰라."

"그거 너무 이기적인 거 알아? 네 욕심 때문에 나를 고통 속에 밀어 넣을 셈이야?"

"알아. 이기적이야. 하지만 누구나 이기적이야. 죽기를 바라는 당신도 이기적인 거고."

"제발, 그러지 마. 이런 건 사는 게 아니야. 너무 힘들다고!"

"당신도 그러지 마.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왜 죽은 것처럼 말하냐고!"


죽지 않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는 뭘까?

극단적인 케이스로 식물인간과 코마를 생각해 보자. 식물인간은 의식은 있으나 인식을 못하고, 코마는 의식 자체가 정지돼 있다. 그러나 둘 다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았다. 인식과 의식이 없으니 살아있다고 하기도 어렵다. 죽지 않았지만 살지도 않은 것은 딱 이 정도일까?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면 외부 자극에 거의 반응하지 않고 감정과 욕망이 마비된다. 의식은 있지만 삶에 대한 연결감이 사라진다. 이 역시 죽지 않았지만 사는 것도 아니다.


또 있다. 우울증은 아니라도 사람이 무기력에 빠지면 감정이 없는 듯 보이고 주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다. 시간 감각조차 흐려진다. 10분 이상 멍 때려 보면 이와 비슷한 상태를 경험해 볼 수 있다.


어떤 충격으로 정신적 해리 상태가 되면 자아와 환경의 경계가 무너져 어느 것도 실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의식은 있지만 주체성이 붕괴된다. 주체가 없으니 죽지는 않아도 산다고 보기 어렵다.


죽지 않는 것을 수동적 행위라고 한다면 사는 것은 능동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사는 것만으로 꽤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아무 한 일 없이 하루를 보낸 것 같은데도 극심한 피로를 느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당연한 것이다. 자각하지 못했겠지만 그 하루 동안 당신은 많은 일을 수행했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어제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혹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누구도 비판할 자격은 없다. 사는 것은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출근할 때 빼고 휴가라서 쉬었다고 치자. 씻고 옷 입고 밖에 나가는 자체가 엄청난 일이다. 커피 주문을 위해 키오스크를 누르는 것도 인내가 필요하고 다른 인간들과 슬쩍 지나치는 것만도 신경 쓰인다. 극악스러운 더위에서 몸을 보호해야 하고 밀린 빨래라도 한다면 이미 용량 초과다. 더 말해 뭐 하겠나?


정부 정책이 바뀌고 유행이 바뀐다. 디지털 기술은 혁신과 업데이트가 끝이 없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시스템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매일 늙고 약해진다. 사는 것이 게임이라면 애당초 생존게임은 불리한 게임이다. 지금은 이겨도 결국에는 지는 게임이다. 당연히 피곤하고 당연히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창작을 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면 대단한 일이다. 생존을 뛰어넘어 삶을 초월하려는 의지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사소한 문제가 있다. 힘을 내어 살고, 조금 더 힘을 내서 창작을 해도 주목받지 못한다. 허탈하고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노력하기 싫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무기력해진다. 사는 게 무의미하고 뭐하는지 싶다. 그래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그냥 사는 상태, 거기서 더 추락하면 바로 죽지만 않은 상태가 된다.


어떤 사람은 무기력에 빠졌다가 곧잘 살아나서 되돌아오지만 어떤 사람은 그 기간이 길고 심지어 못 돌아오기도 한다. 무기력에서 회복하는 것이 꼭 좋은 것도 아니다. 부활해서 한번 더 노력하는 것은 좋은데 역시 잘 안 되면 또 슬럼프에 빠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무한반복이다. 시시푸스의 형벌이다.

그것이 싫어서 아예 돌아오지 않고 창작을 접는다면 마음은 편할지 몰라도 계속 무기력하다. 허무의 소용돌이에 빠져 다시는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없다. 둘 중 어느 것이 나은지는 모르겠다.


도전해 보고, 실패해 보고, 좌절해 보고, 부활해 보고, 다시 도전하고 또 실패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하면 삶이 시시해지기도 한다. 스스로 객관화가 익숙해지면 왠지 초탈한 것 같고 점점 내 삶에서 멀어진다. 수행자의 길에 접어든 것 같다. 욕망과 감정을 최소화하면서 마침내 자아를 소거한 상태를 상상한다. 해탈의 경지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적 해탈 추구는 또 하나의 '죽지만 않은' 상태와 유사하다. 우울증이나 정신적 해리에 비해 폼은 나지만 결국 비슷하다. 욕망을 버리고 감정에서 벗어나며 주변 사람들과 인연을 끊고 세상과 일체가 된다. 죽음이 아닌데도 '살고 있음'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 의도가 다를 뿐이지 적극적으로 인생을 영위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다를 게 없다.


그저 선택의 문제다. 죽지 않을 것인지, 살 것인지. 만약 살 것이라면 생존 이상의 것을 원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야 한다. 사는 것 자체가 노력이다.

아무것도 이룬 게 없어도 하루를 버티고 삶을 지켰다. 오늘은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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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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