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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희망 없이도 강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by 시sy

하다 하다 이제 더위까지 생존을 위협하는 시대가 되었다. 나는 인류가 망하면 미지의 전염병으로 좀비 떼가 창궐하거나, 핵전쟁이 벌어지거나, 환경파괴로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한 초지능(인공지능)의 결단 때문일 것이라 믿어왔다.

틀렸다. 우리는 그전에 더위 때문에 죽을 것이다. 어제 강렬한 햇빛에 반바지 밑으로 드러난 맨살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이건 뭐가 잘못됐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정전이라도 된다면? 에어컨이 고장난다면? 에어컨 가동할 돈이 없다면? 나는 죽는다.

야외에 주차해 둔 차에 올라타 무심코 잡은 핸들에 화상을 입을 뻔했다. 이게 정상인가?


상가 주차요원은 벤츠를 주차선 위에 걸쳐 놓고 도망치는 여성을 죽일 듯 쫓아가고, 치킨 배달 온 라이더는 복도가 어두워 사진을 찍을 수 없다며 아무에게나 고함을 질러댄다. 이게 그럴 일인가? 다들 미쳐간다.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니체, <우상의 황혼>


우리를 죽이지 못하면 우리를 강하게 만들 뿐 아니라, 더욱 화나게 만든다.

짐승도 어설프게 건드리면 죽자고 달려든다. 하물며 짐승의 왕인 인간이 어떻겠나? 가뜩이나 살기 어려운데 서로를 상처 내기 시작하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하고 있다.


개개인의 역량에 차이가 나고 취향과 특징이 제각각이다. 그러나 인간은 남보다 잘 살기를 원하고 그것이 생존의 방식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당연한 산물이며 태초의 원인 유발자다. 각자도생, 이러니 세상은 불공평이 기본 세팅일 수밖에 없다.

세상이 정말 공명정대하다면 어떻게 초과이익이 발생하고 빈곤이 사회문제가 될 것인가? 많이 갖는 자가 있으면 적게 갖는 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자명한 이치다.


당하지 않으려면 모두에게 강해져라 충고하고 싶지만 그런 사회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강하다'는 개념 자체가 '누구보다 강하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니 모두가 강해질 수는 절대 없다. 약자와 피해자는 반드시 발생한다. 유능한 대통령은커녕 신이 재림해도 이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다.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관대함과 관용뿐이다. 강자가 이길 수밖에 없는 구조, 승자가 더 많이 가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 강자와 승자가 약자와 패자에게 관용을 베풀고 관대함을 보여야 한다. 5개면 충분한 것을 100개 이상 가지고 1개밖에 없는 이들에게 4개를 나눠줘도 그는 90개 이상의 잉여가치가 남는다. 그 정도면 되지 않나? 경쟁에 이겼으면 패자도 살아는 갈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나? 이미 쓰러진 상대가 절대 재기하지 못하게 짓밟고 난자해야 직성이 풀리나?


사실 희망은 없다.

인간은 이기적인 데다 위선적이기 때문이다. 관용을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려운 이유가 이것이다.

강자와 승자는 필연적으로 더 이기적이고 더 위선적이다. 역사적으로 권력은 위선적인 판단과 행동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Lammers와 Galinsky는 실험을 통해 '권력 있는 사람일수록 다른 이를 더 엄격하게 판단하면서, 자신은 관대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을 증명 했다. 실험까지도 필요 없다. 정치인이나 재벌, 공직자들의 부정부패, 갑질 뉴스가 끊이지 않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뉴스 안 봐도 된다. 직장에서 상사들이 하는 행동을 보라. 책임은 전가하고 성과는 독차지한다. 그런 인간일수록 진급이 빠르다. 그러면서 말한다. 직장은 놀이터가 아니다. 맞는 말이다. 스스로 돌아보기 바란다. 나는 그렇지 않은가? 나는 관용을 베풀고 있는가?


“진정한 정의는 강자에 대한 법이 아니라, 강자의 자기 절제에서 시작된다.”

- 마이클 왈처(Michael Walzer)


사실상 진정한 강자를 구속할 법규는 없다. 법을 바꿀 수 있는 권력자에게 법조항을 들이대도 그 조항을 바꾸면 그만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강자의 관용이다. 힘없는 사람이 관용을 베풀면 그냥 참는 것에 불과하지만 강자의 관용은 의지에서 비롯된 고결한 행위다.


그러나 이 역시 불가능하다. 강자의 여러 속성 중에 관용은 포함되지 않는다. 관용의 가치는 강자가 되는 과정에서 잊힌다. 아무리 좋은 의도와 신념에서 출발해도 강자가 되는 과정이 관용을 용납하지 않는다. 관대한 사람은 절대 강자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다.


그리하여 희망은 없다. 승자와 강자에게 관용을 애걸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크지 않다.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들만큼 강하지 못하고 이기지 못했다. 그저 살아있는 게 다행이다. 강자는 우리에게 더위와 비슷하다. 원망하고 미워할 수 있어도 바꾸지 못한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오직 하나, 나다. 나의 태도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세상이 나를 바꾸게 두지 말자. 그리고 희망을 버리자. 그들이 바뀔 것이라 희망하지 말고 더 좋은 세상이 찾아올 것이라 희망하지 말자.

언제부터인가 희망 없이 사는 게 힘들어졌다. 일 끝나고 치맥 한잔, 여름휴가, 일본 여행, 자녀가 좋은 대학을 갈 것이라는 희망, 집값, 주식, 로또, 그것도 아니면 소소한 이벤트 당첨이라도 있어야 하루를 버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의 작은 희망마저 이용당하고 약탈과 억압의 미끼가 될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그냥 강해져야 한다. 희망으로 사는 게 아니라, 견디는 힘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희망 없이 강해지는 방법이다.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에 강해져야 한다. 강해지는 건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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