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서 온도를 쟀더니 무려 29도, 습도는 80%, 더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떡하지? 내가 뭘 어떻게 할 방법은 전혀 없다. 지난해 지겨우리만큼 긴 여름을 보내며 여름과 이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뿐이다. 아마 죽자고 덤벼드는 이 무더위는 정말 죽을 때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존재의 엄중함을 질펀하게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생각의 프레임을 바꾸자. '어떻게 하지?'를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안 하지?'를 생각하면 어떨까?
오늘처럼 더운 날에는 뭔가 하기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아무것도 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오늘 같이 더운 날, 가장 직관적인 '아무것도 안 하기' 3단계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에어컨을 켠다. 2. 편하게 적당히 눕는다. 3. 뭔가 하려는 죄책감을 버린다.
쉬울 것 같지만 정작 해 보면 세 번째 3단계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평생을 뭔가 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열심히. 살기 위해 이기기 위해 잘하기 위해 뽐내기 위해 자기만족을 위해. 그러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 밀려드는 죄책감을 벗어던지기는 어렵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합리화해야 하나?
선불교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무위이화(無爲而化)”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이 스스로 변화한다.
얼마나 멋진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른 것들이 알아서 변한다니.. 마치 이리저리 집을 옮겨 다니며 부동산 재테크를 하지 않아도 살고 있던 집값이 마구 올라 부자가 되는 것과 같다. 너무 거창한가? 그럼 이건 어떨까? 가기 싫은 약속이 있었는데 그쪽의 사유로 저절로 없어지는 경우, 이 정도는 누구나 겪어보지 않았을까?
이런 식의 행운이 찾아오려면 일단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지금 안 사면 늦는다고 해서 집 사고 나면 내 집만 내리고, 그걸 못 참고 먼저 약속을 취소했다가 나만 신뢰를 잃고 상대편만 좋아한다. 이 역시 내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게으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만히 있는 것, 그런 것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선사(禪師)에게 제자가 묻는다.
“스승님,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앉아라. 생각하지 마라. 아무것도 하지 마라.”
이게 좌선(坐禪)이다. 나는 아무도 하지 않음으로써 내 안에 있는 근원적인 존재 그 자체를 마주하고 바라보면서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것은 범인인 우리에게 소용없다. 지금 필요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마음 편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철학적으로 따지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는 순간 바로 그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꼬치꼬치 따지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하루를 보내고 싶을 뿐이다.
어쩔 수 없이 출근했다면 출근은 하고 아무것도 안 하기.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기.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셜 미디어 체크 안 하기. 걷는 중에 핸드폰 보지 않기. 검은 화면 밝히는 알림 무시하기. 별일 없는데 일 생각 안 하기. 점심 뭐 먹을지 고민 안 하기. 30분이라도 가족 생각 지우기. 그리하여 오직 공허함으로 이 시간을 채우고 싶다.
하루가 힘들다면 몇 초만이라도 아무것도 안 하면 어떨까? 엄밀히 하루라는 개념은 허상에 가깝다. 물리학적으로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의식은 오직 현재만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현재라는 것이 생각만큼 길지 않다.
신경과학자들은 인간이 '지금'이라고 느끼는 시간은 2~3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는 2~3초를 하나의 지각 단위로 묶어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심리적 현재' 또는 '지각적 현재창'이라고 부른다. 만약 지각적 현재창이 이보다도 짧다면 인간은 멜로디를 느낄 수 없다. 분절된 소리 하나하나가 아니라 2~3초 정도 연속으로 묶어서 인식하기 때문에 선율이 아름답다 생각한다.
대화할 때도 비슷하다. “너 지금 뭐 해?”라는 말이 순차적으로 들려도, 뇌는 짧은 시간 안에 그걸 하나의 의미 덩어리로 묶는다. 그리고 그 '지금'은 3초 정도다.
3초를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잘 아무것도 안 한 것일까?
현실 회피나 무기력을 권하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다.
비교에 흔들리지 않는다.
가만히 있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다.
3초 뒤에는 또 3초가 남아 있으니 나의 지금을 조금씩 연장한다. 가만히,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나의 현재를 길게 빚어낸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불안도 비교도 없이, 가만히 있는 나를 용서한다.
존재는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