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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냐, 사느냐, 정답은 없어도 질문은 유효하다.

by 시sy

혼자 사는 A씨의 집에는 쓰지 않는 방이 있다.

닫힌 방, 하루에 한번 열리는 방. 열리는 시간은 정해져있다. A씨가 출근하기 직전에 딱 한번 열린다. 그 방에 가구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조명도 없다. 천장 조명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전등 대신 괴이한 것이 매달려 있다. 목 매 죽기 딱 좋은 사이즈의 올가미, 친절하게도 올가미 밑에는 작은 크기의 나무 스툴도 놓여있다. 죽기 위해 의자를 찾아야 하는 수고를 덜어줄 목적이었다.

물론 한번도 사용하지는 않았다. 대신 A씨는 출근할 때마다 닫힌 방의 문을 열고 올가미를 올려다 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래,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일 뿐이지. 그리고 문이 닫힌다.


A씨는 대기업의 프로그래머였다. 딱히 원한 직업은 아니었지만 남들처럼 대학 나와 취업해 보니 그렇게 됐다. 견딜만한 근무시간과 적당한 연봉, 나쁠 것 없었다. 다만 몇 시간씩 기계적으로 코딩을 하다보면 스스로 인간인지 시스템의 일부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하루 종일 하는 코딩이 좋을 때도 있었다. 아무리 복잡한 프로그램도 결국은 입력과 출력, 함수와 연산, 그리고 데이터의 조합일 뿐이다. 반복해서 쪼개고 쪼개면 0과 1 이진수로 돌아간다. 0과 1, 얼마나 단순한가?

그래서 생각했다. 삶의 여러 문제들도 결국은 코딩과 같지 않을까? 쪼개고 쪼개면 0과 1처럼 단순한 하나의 질문으로 환원되지 않을까? 죽느냐, 사느냐.


그래서 닫힌 방을 만들었다. 삶이 복잡해 질 때면 올가미를 보면서 생각한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결국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죽지 않을 거면 살아야지. 우선 오늘은 살자.


파이썬에는 boolean indexing이라는 방식이 있다. 불린 인덱싱을 통하면 수많은 조건과 경우의 수가 얽혀도 결과는 둘 중 하나뿐이다. True 또는 False. 만약 불린 인덱싱으로 내 인생을 필터링할 수 있다면 그 결과는 둘 중 하나로 나올 것이다. 참이냐, 거짓이냐. 존재냐 무냐. 삶이냐, 죽음이냐.


매혹적이다. 세상사 아무리 복잡해도 참과 거짓 딱 두가지로 판별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요즘 프로그램으로 구현할 수 없는 것은 거의 없다. 생성형 AI는 글도 쓰고, 음악도 작곡하고, 그림도 그리고, 인간처럼 판단도 한다. 0과 1을 함수로 복잡하게 구성하면 한 사람의 인생도 구현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거꾸로 인생을 정교하게 분해하면 0과 1로 환원되지 않을까?


"To be, or not to be."

유명한 햄릿의 대사에는 깊은 통찰이 담겨져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

2진수의 언어로 다시 쓰면, 0이냐, 1이냐를 세익스피어가 말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결국 이 질문으로 수렴할 수도 있겠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것도, 죽지 않아야 할 이유를 붙드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내가 존재를 계속 이어갈 것인가?' 라는 판단의 문제 아닐까?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하고 싶은가? 철학적 문제부터 비즈니스, 인간관계, 일상사 사소한 문제들까지 사실은 죽느냐, 사느냐 문제의 조합일 뿐이다. 다만 복잡한 문제 속에는 무한한 변수와 모순, 감정, 역사, 삶의 맥락이 들어 있기 때문에 단순한 0과 1로 간단히 선택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하지 못하고 0과 1 사이의 떨림 속에 살며 고뇌한다.

질문의 진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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