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Homo Fessus: 나는 피곤하다, 고로 존재한다.

피곤한 인간

by 시sy

그리 다르지 않은 월요일이었을 뿐이다.

장마가 시작돼 부슬비가 내렸고 높은 습도에 차량 에어컨을 2단으로 올렸다. 다들 출근하기 싫어 차를 들고 나왔는지 평상시보다 차가 더 막혔다. 이수 고가도로에 줄지어 늘어선 차량 행렬을 보며 한숨을 쉬었는데 평상시와 공기가 달랐다. 뭐가 달라진 것일까?

잠이 덜 깨, 부팅 덜 된 컴퓨터 마냥 생각이 덜덜거리고 눈을 크게 뜨는 것조차 힘들어 반만 뜨고 있지만, 여기까지는 같다. 늘 피곤하니가.

그럼에도 뭔가 틀어진 느낌, 달라진 느낌, 몸에 맞지 않고 불편하다. 뭐지? 아직 꿈인가?


내가 내가 아닌 기분이었다. 다른 영혼이 내 몸속에 들어와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하는 느낌이랄까? 핸들을 돌리는 손마디의 느낌이 어색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현재 나는 내가 아니다. 다른 영혼이 맞지 않는 몸에 들어와서 모든 것을 흩트려 놓고 있다.


출근해서 주요 메일을 체크하고 커피를 사러 잠시 다녀올 때까지 내버려 뒀다. 어차피 애틋하지 않은 인생이다. 내 몸이 그리 대단할 것도 없으니 가져갈 테면 그리 하라. 나는 이만 비켜서겠다. 내 대신 내 인생을 살아준다면 땡큐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영혼은 떠났다. 10시를 넘어 커피 카페인이 내 몸을 장악하자 슬그머니 빠져나간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왔던 것처럼 언제 또 오겠다는 기별도 없이 가버렸다.


나는 다시 온전한 내가 됐다. 내 인생의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진 무거운 남자, 내딛는 걸음걸음이 너무 무거워 30미터 거리의 화장실까지 다녀오는데 10분은 걸리는 인간, 그게 나다. 피곤한 인간, 호모 페수스(homo fessus).


도무지 하루 중 안 피곤한 시간이 있기나 한 것일까? 곰곰이 따져 보니 온종일 피곤한 데에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1. 잠에서 깨어 일어났을 때의 피곤함. 단 하루라도 '아 잘 잤어. 너무 개운해. 이제 일어나야지. 벌떡!' 이렇게 일어난 적이 있을까? 평일은 평일대로 휴일은 휴일대로 힘들게 일어난다. 출근을 앞두고 억지로 일어날 때 피곤함이야 말할 것도 없고, 휴일인데도 침대에서 뭉개다가 더 자기도 힘들어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바로 수면 관성 때문이다. 잠에서 깬 후의 뇌는 완전한 각성 상태로 전환되는데 시간이 걸린다. 구형 컴퓨터라도 1~2분이면 부팅되지만 인간 뇌의 부팅은 1시간까지도 걸린다.


2. 모닝커피 전까지의 무력함. 자동 로봇처럼 씻고 바르고 옷 입고 가방 챙겨서 출근한다. 이 과정에서 두뇌의 연산기능은 거의 필요 없다. 잠이 덜 깼지만 출근 부담 때문에 피곤하다는 사실마저 망각하고 회사로 향한다. 그리고 일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약물의 도움이 필요하다. 바로 커피 카페인.

급한 것들만 대충 처리하고 좀비처럼 카페인을 찾아 단골 커피 매장으로 향한다. 보통 어떻게 다녀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가끔 공기의 온도로 계절변화를 감지할 뿐이다.

웃기는 건,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면 뇌에 루틴이 생겨 커피가 들어가기 전까지는 정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파민이나 아드레날린 등 각성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를 촉진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카페인을 투입해야 하는 몸이 된 것이다.


3. 점심 식사 후 식곤증. 설명이 필요 없다. 점심으로 몇 숟가락 뜨자마자 졸음이 몰려온다. 어이없다. 정상적인 식곤증이라면 밥은 다 먹고 생겨야 하는 것 아닌가? 이건 뭐 밥 먹다가 졸려서 밥을 마저 먹기도 힘들다. 과학적으로는 탄수화물이 많은 식사를 하면 혈당이 급상승하고 인슐린 분비가 활발해져 졸음을 유발하는 세로토닌과 멜로토닌의 전구체들이 증가한다고 한다.


4. 오후의 햇살과 업무 피로. 오후 3시의 늘어진 햇살을 맞아 보았나? 잘게 부서지는 노란 빛깔과 살짝 따가우면서도 까칠한 그 촉감을 상상만 해도 피곤하다. 그런데 그쯤 되면 당연하게 업무 피로가 누적돼 있다. 카페인 400mg을 추가 투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무도 모르게 의자에 기대어 살짝 조는 게 낫다는 비합리적인 판단을 한다. 그만큼 정상이 아니다.

뇌에서는 그나마 정상적인 연산작용을 촉진하던 코르티솔 수치가 서서히 감소할 시간이다. 그래도 버틴다. 한두 시간만 지나면 퇴근이니까.


5. 퇴근길의 피로와 운동 스트레스. 출근길에 비해 퇴근길은 운전하기가 배는 힘들다. 똑같이 1시간이 걸려도 퇴근길에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다. 당떨어짐 방지 사탕을 입에 물고 음악을 크게 튼다. 답답증이 몰려오면 창문도 내린다. 정신적 에너지 고갈과 함께 육체적으로도 회복이 필요한 시간이다.

퇴근길이 무거운 데에는 심리적 요인도 한몫한다. 집에 가봐야 뭐 대단한 기쁨이 기다릴까? 일단은 생존을 위한 운동을 위해 체육관으로 피신한다. 나 좀 해봐요~ 손짓하는 어려운 머신들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숨쉬기 운동이나 다름없는 강도로 운동루틴을 완수한다. 지키는 사람도 없고 칭찬해 줄 사람도 없는데 무슨 눈치를 그리 보는지.


6. 저녁 식사 후 무너짐. 1시간 정도의 운동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모든 에너지를 태우고 나면 오직 먹겠다는 의지밖에 남지 않는다. 쇼펜하우어가 떠오른다. 우리를 살게 하는 건 맹목적 의지!

아무리 적게 먹어도 일단 저녁을 먹으면 내 의식은 이미 저세상을 향해 떠나고 있다. 안돼! 지금 자면 끝이야!

가출하려는 정신줄을 붙잡고 진정한 자기와의 싸움을 시작한다. 뭐라도 해야 해. 차라리 넷플릭스를 봐. 책 안 안 읽어도 괜찮아. 글 안 써도 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눕지만 마. 지금 눈 끄면 새벽에 깬다고!


이러니 하루 종일 피곤하다. 냉정하게 안 피곤한 시간을 챙겨 보니, 카페인 효과가 본격 나타나는 오전 10시 반부터 점심 식사 전까지가 전부였다. 그렇다고 밥을 안 먹고 살 수도 없고.


결론적으로 피곤은 피할 수 없다. 살아있는 한 피곤할 것이고 장담하건대 더 심해질 것이다. 어떡하지?

그래서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오전 10시 반부터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반대로 그 시간 동안에는 다른 쓰잘 데 없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으리라! 너무도 귀중한 시간이니.


그러면 나머지 시간 대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냥 멍하게 살기로 했다. 딱히 정신 차리고 있어 봐야 나을 것도 없는 세상 아닌가. 참고로 나 아닌 다른 영혼이 들어와 내 몸을 사용하겠다면 무상임대도 가능하다.

스크린샷 2025-06-17 오전 10.28.01.png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10화걱정 증가의 법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