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효능감의 정체
톨스토이의 대작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돌리는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할 뿐 그녀 자신을 위한 인생은 전혀 살지 않았다. 돌리의 남편 스티바는 경제관념이 희박하고 낙천적이어서 생계와 육아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가족을 보살펴야 하니 돌리가 앞장서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재정을 걱정하고 아이들의 건강과 교육을 책임지며, 반푼이 남편이 망쳐놓은 여러 실수들도 수습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자신을 위한 행동은 하나도 하지 않는 점이다. 사회적 야망은 당연히 없고 자기 계발 의지도 없으며 개인적 취미 하나 없이 오직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 어떤 의미에서 주인공 안나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보라. 사회적 비난과 내적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사랑과 욕망을 위해 기존 질서를 깨는 선택을 하며 결국에는 파국을 향해 나아간다. -이름처럼 멋지다!
그렇다고 돌리가 바보는 아니다. 그녀는 남편 스티바가 자기를 봐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매력이 줄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남편에게 끝없이 실망하면서 그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혼자 살림을 유지하고 가족을 지킬 것이다. 그녀도 안다.
그럼에도 돌리는 가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믿으며 감정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데도 '옳은' 방향으로 행동하는 선택을 한다. 그녀는 현명하다. 사회적 제도나 환경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니 그녀가 견디는 것이 현실적이라 판단한 것이다.
언제나 이상한 것 투성이인 인간의 어떤 심리가 돌리에게 저런 판단을 내리게 했을까?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지 않나? 돌리는 아무리 봐도 이기적인 구석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가지?
흥미롭게도 우리 사회에는 돌리 같은 캐릭터가 꽤 많이 존재한다. 특히 과거 한국사회의 어머니 상은 딱 돌리와 같은 여성이었다. 자식과 남편, 가족을 위해 무한한 희생을 강요당하면서도 감내해야 하고 아무런 보상도 없는 뭣 같은 시스템에 두 번 배신당한다.
사실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위해 사는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산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위한 행위이며 살고자 하는 욕구도 스스로 생성한 욕구이기 때문이다. 다만 기저 의식 속에서 제각각 살기 위한 핑계를 찾는데 이게 천차만별이다. 그렇다 보니 남들이 볼 때 도저히 핑계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돌리처럼.
돌리의 핑계는 무엇일까? 그녀의 힘겹고 지겨운 삶을 지탱해 주는 기저 심리는 무엇일까? 다른 건 몰라도 확실한 것 하나는 바로 자기효능감이다. 미친 자기효능감.
돌리의 희생에 대한 현실적 보상은 전무하다. 인간이 대단한 것 같아도 결국에는 메커니즘을 따르는 생리적 머신이다. 메커니즘이 동작하려면 반드시 보상이 필요한데 정말 말도 안 되고 보잘것없지만 확실한 보상으로서 작동하는 것이 자기효능감이다.
자기효능감은 자기만족과 다르다. 만족은 조금이라도 만족감이 들지만, 자기효능감은 일말의 만족감도 없다. 심지어 본인이 느끼지도 못해서 왜 자기가 이 일을 했는지 후회하며 한탄한다. 내가 미쳤지, 왜 또 그랬을까? 저 인간이 무슨 도움이 된다고. 뭘 줄 게 있다고. 도대체 왜?
남들이 볼 때 아무 쓸모없는 일을 했다 하더라도 돌리 본인은 자기효능감을 느꼈다. -스스로 부정할 수도 있지만.
심리학적으로 인간은 부모 돌봄, 집안 운영, 가족 지원 같은 항목을 '내가 맡아야 하는 영역'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은 선호나 감정과 무관하게 작동한다. 그래서 이 의무를 수행하면 성격적 보상, 즉 자기효능감이 발생하기 때문에 비슷한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돌볼 때는 자기효능감이 생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자기 대상 행동은 평가자가 없고, 피드백이 약해서 보상 자극이 적다. 더구나 역할 수행이라는 카테고리에 잘 맞지 않다 보니 자기효능감 회로가 덜 활성화된다. 이런 이유로 자기 자신에 대한 소비에 인색해진다.
특히 인간의 뇌는 항상 안정감을 선호하는데, '옳다고 믿는 역할'을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이 안정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인간도 많다. 어떤 인간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며 크든 작든 직접적으로 자기를 위한 행위를 해야만 살 수 있다. 이런 스타일의 인간은 '정확히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이 살아가는 핑계가 된다.
어떤 스타일의 인간이든 그 누구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삶의 핑계는 인간의 수만큼 다양할 것이고 누구의 핑계가 가장 훌륭하고 적당한지는 정할 수 없고 정해봐야 무의미하다. 그러니 돌리의 핑계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의 핑계를 우습게 여기는 것과 같다.
살아가는 것이 온전히 자기 의지는 아니다. 아무 핑계 없이 그냥 살 수도 있다. 동시에 어떤 사람은 아주 작은 이유에 의지해서 삶을 이어간다. 남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사소하고 보잘 것 없어도 말이다.
누구도 그녀를 비판할 수 없다.
핑계가 있든 없든, 그 핑계가 무엇이든 모든 삶은 옳다. -타인을 억압하는 것들은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