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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Nov 26. 2015

맛이 아니라 멋으로 마시는 거지

[酒力하다] 마티니 martini

술 한 잔 하자는 제안을 받고 말 그대로 ‘딱 한 잔’만 할 요량이면 바에 가서 칵테일을 주문한다. 피나콜라나와 마티니. 내 앞에 놓이는 것은 피나콜라다.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무알콜을 주문한 그에게 당연하다는 듯 마티니다. 그의 앞에 놓인 마티니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이번에도  역시’라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칵테일의 제왕이라고도 불리는 마티니, 마티니는 드라이 진을 베이스에 드라이 베르무트를 섞어 만들기에 진이 가진 고유한 씁쓸한 맛과 가니시로 올라가는 올리브의 짠맛을 음미하며 마신다. 그런 덕분에 남성잡지에서는 마티니를 다룰 때 ‘남자의 칵테일’이라는 수식을 붙이곤 한다.

     

더티 마티니를 마시는 아이언맨 토니 스토크, 보드카 마티니를 주문하며 젓지 말고 흔들어서 (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라고 요구하는 MI6 요원 007, 그런 제임스 본드를 비웃기라도 하듯 드라이진에 베르무스는 눈으로 보고 저으라고 요청하는 킹스맨 에그시, 자신만의 마티니를 상징처럼 마시는 남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달지 않다는 이유로 마티니를 남자의 술이라고 부르는 건 어딘가 마땅찮다. 남자들에게도 마티니는 결코 쉬운 술은 아니다. 그러나 다양하게 변형 가능한 마티니를 남성이 독식하게 두기에는 여성에게도 매력 넘치는 술이다.  


<아이언맨>에서 페퍼 포츠는 긴장한 순간에 토니 스타크에게 마티니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다. 올리브는 많이, 최소한 세 개를 요구한다. <블루 재스민>에서 재스민은 신경안정제라며 스톨리 마티니(스톨리치나야 보드카를 베이스로 한 마니티)를 마신다. <섹스앤더시티>에서 사만다가 자주 마시는 칵테일도 마티니다.


마티니를 처음 마신 건 서른 무렵이었다. 맥주는 배가 불러와서 불편했고 와인은 아무리 조심해도 몇 잔 마시다 보면 입술과 혀가 꼴사납게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단맛이 강한 칵테일도, 술에 얼음이 들어가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런 이유라면 마티니가 적격이었다.


솔직히 허세를 부린 것도 있다. 코스모폴리탄이나 맨해튼 같은 칵테일도 마티니를 대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분홍의 코스모폴리탄과 붉은 노을빛의 맨해튼은 칵테일의 빛깔 때문에 어딘가 모르게 여성 전용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술 마시는 걸로 승부를 내는 건 아니었지만 술을 마실 때만큼은 여자여자함을 내세우며 약한 척 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에는 진 특유의 맛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던 때였기에 하드코어적인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마티니를 시키는 멋스러움이 좋았던 것이다.


흥미로운 건 남자들과 동반한 자리에서 드라이마티니를 주문하면 다섯에 셋은 바텐더를 보며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라는 007 제임스 본드의 대사를 외치며 아는 척을 해댄다는 것이다. 자신의 문화예술적인 소양을 어디서든 어느 틈에서든 드러내겠다는 욕망이 귀엽긴 하지만 “아뇨, 얼린 고든스 진 베이스로, 냉동 보관한 마티니 잔에 저어서 만들어 주세요.”라고 제동을 건다. 상대는 머쓱해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마티니야 말로 개인의 취향을 완벽하게 반영하는 술이다.


마티니가 남자의 칵테일이라는 이미지는 대표적으로 007에서 온 것이겠지만, 제임스 본드가 마시는 마티니는 진이 아니라 무색, 무취, 무향의 보드카를 베이스로 하기에 한결 쓴 맛이 줄어든다. 심지어 보드카와 베르무트를 쉐이킹 하면서 생긴 공기방울은 마티니를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거침없고 강한 남성의 이미지를 가진 제임스 본드는 고전적인 마티니보다 훨씬 부드러운 마티니를 마시는 셈이다.


내가 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몸에 좋을 것 같은 그 특유의 씁쓸한 향과 맛 때문이다. 그러니 경망스럽게 나서서 보드카 마티니로 주문하는 걸 봐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킹스맨>에서 해리 하트는 에그시에게 젠틀맨이 되기 위해서는 마티니를 만드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자신만의 마티니 취향을 가지는 것은 젠틀‘맨’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나만의 시그니처 마티니를 찾기는 어렵다. 자신만의 고집을 가지고 있되 손님에게 강요하지 않는 친절한 바텐더를 만나 기본적인 나의 취향을 공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도전해볼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시도해보는 과정은 필요하다. 베이스가 되는 대표적인 드라이 진의 브랜드와 그 특징을 마셔보면서 익혀나가면 된다.

   

그림.ㄱㅎㅇ


네덜란드에서 처음 만들어져 영국으로 넘어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진은 과거와 달리 달콤함을 빼고 드라이한 맛을 유지하고 있다. 각 제조사마다 주니퍼 베리 이외에 주정에 첨가하는 재료의 차이로 개성을 달리한다. 시트러스 계열이 많이 첨가된 탱커레이 no.10의 경우 마티니에 사용하기에 훌륭하다. 비피터나 고든스도 마티니에 사용된다. 개인적인 선호에선 비피터는 뒤로 밀린다. 어째서인지 다른 진과는 다르게 한 모금만 마셔도 미간을 찌푸리게 만드는 특유의 쓴 맛이 강하게 느껴진다. 최근 들어 무척이나 깔끔한 인상을 남긴 건 부들스 진이었다. 제조사에서도 아예 얼음과 진 그리고 레몬만 넣고(윈스턴 처칠이 그렇게 마신 진 브랜드로 유명하다) 진 고유의 맛을 즐기라고 할 정도로 근사한 맛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베르무트를 거의 섞지 않는 네이키드 마티니로 시도했을 때도 만족스러운 맛을 보여주었다.  


마시기 결코 쉽지 않은 마티니를 시도하고, 내가 원하는 마티니가 무엇인지 찾아나가는 것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허세로운 나, 남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약해 보이고 싶지 않은 나, 쓴맛을 잘 견디는 나, 생각보단 해독력이 좋은 간을 가진 나, 그렇다고 자신의 주량을 과신하기보단 절제하면서 즐길 줄 아는 나. 그런 과정 속에서 나만의 마티니를 능숙하게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마티니를 즐기는 모습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멋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처음 찾은 바에서 여자인 내가 마티니를 주문하면 바텐더가 긴장을 하는 게 느껴진다. 바의 얼굴이 진토닉이라면 바텐더의 얼굴은 마티니라고 할 정도로 만드는 사람의 개성도 표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레시피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칵테일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아직까진 마티니를 즐기는 여성들이 드물기에 마티니를 정확하게 주문하면 술맛을 아는 분위기를 풍긴다고 했다. 아직 한참 부족한 수준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제대로 된 마티니의 주문 덕분에 좀 더 섬세하게 공을 들인 마티니를 마실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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