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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Nov 30. 2015

정곡을 찔리다

[酒力하다] 김렛 Gimlet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을 읽은 날이었다. ‘빅 슬립’부터 ‘안녕 내 사랑’ 차례대로 읽었지만 하드보일드의 매력은 도대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읽는 내내 읽기 힘들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건조한 문체 덕분에 암울한 분위기가 진하게 풍겨왔고 그런 걸 견디기에는 당시의 내 상태가 좋지 못했다. 현실도피가 필요해서 택한 책에서 냉엄한 현실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극찬한 작가라고 해서 나에게도 동일한 감동을 줘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은 미래, 재능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없는 마음과 내가 가진 나태함이 뒤섞여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던 그날 그를 만났다.     

   

어두컴컴하고 좁은 지하 바에서 김렛을 시켰다. 김렛은 ‘기나긴 이별’에서 사건의 범인인 테리 레녹스가 탐정인 필립 말로와 함께 마시는 칵테일이다. 진과 로즈사에서 나온 라임 주스를 반반 섞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아야 한다는 테리 레녹스의 레시피와는 달리 그날 나온 김렛은 너무 달고 새콤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투정을 잔뜩 부리고 싶은 날이었다. 괜한 시비도 걸고 싶은 마음이었다. 분명 발전적인 관계가 될 수 있을 만큼 감정을 공유하고 있으면서 좋은 친구라는 말로 선을 넘어오지 않고 있는 그가 다른 날보다 더 얄미울 수밖에 없었다. 자존감이 낮아질 때는 사랑받고 싶은 못난 마음이 불쑥 튀어나오지만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아 유치하게 못되게 굴고 마는 것이다.      


“필립 말로는 여자의 사랑을 제대로 받을 줄도 모르는 남자잖아. 그런 남자가 대체 무슨 매력이 있다는 거야. ‘터프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소. 그러나 젠틀 하지 않으면 살 가치가 없소.’라고 말하지만 센 척하다가 얻어터지기만 하고, 여자들과 얽히지 않는 것이 신사다운 건 아니잖아! 그는 분명 자신의 불능을 숨기기 위해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남자일 거야.”     


문학사에 길이 남을 탐정에게 ‘너는 고자’라고 선언하고 말았다. 한 모금 마시고 내버려 둔 김렛 잔 입구의 설탕이 나를 비웃듯 반짝거렸다. 그래도 질 수 없다. 우겨야 하는 순간에는 절대 틈을 보이거나 약해지지 말고 바득바득 우겨야 했다.      



“여자가  온몸을 던져 안겨오는데 그걸 거부하다니, 정말 비겁해. 세상에 대한 동정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어떻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에게 매몰차게 굴 수 있어? 싫은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가 만약 그 여자였다면 수치심에 죽어버렸을 거야.”     


필립 말로를 빗대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눈치 빠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7살이나 어린 20대 중반의 내가 쓰는 수야 그에게는 뻔해 보였을 것이다. 그는 내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딱 한 마디만 덧붙였다.     


“프로페셔널함이란 섹스하지 않음에 있는 거야.”     


그 말을 듣고도 나의 쀼루퉁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선문답이나 던지는 늙은이 같은 그의 태도에 질려버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먼드 챈들러는 읽기 힘들었다고 징징거리는 내게 하드보일드의 기조는 유지하고 있지만 무라노 미로라는 매력적인 여자 탐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기리노 나쓰오가 쓴 소설 시리즈를 추천해주었다. 이러니 당해낼 재간이 없다. 내가 무엇을 좋아할지 정확하게 알고 추천해 주는 그와의 관계를 단 칼에 잘라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의 생기발랄하고 보답을 필요로 하는 사랑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그에게 서서히 지쳐갈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그를 놓아버렸다.      


그 후로 7년이 흘러 내가 그의 나이가 되었을 때 플리머스 진을 보유하고 있는 바에 가게 되었다. 플리머스는 1793년 영국의 해운 기지 부근에 증류소를 세우고 해군에 납품해서 ‘영국 해군의 진’으로 유명한 진이었다. 병 라벨에도 해군을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은 아니라 흥미를 보이자 바텐더는 상쾌하면서도 부드러운 단맛이 느껴지는 이 진을 베이스로 한 김렛을 추천했다.     


“저에게 김렛은 지나치게 달더라구요. 나사송곳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에 비해 뭉툭하게 느껴지는 술이었달 까나요.”     


“요즘 사람들이 마시는 김렛은 클래식 레시피와는 달리 설탕과 비터스를 첨가해서 단맛이 좀 더 강하게 느껴지죠. 생 라임과 진만 들어간 김렛을 드셔 보시겠어요? 비율은 반반으로 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 해군의 괴혈병 방지를 위해 라임주스를 처방했지만 남자다움을 내세우며 과일주스 따위 마시지 않으려고 하는 병사들에게 어떻게든 라임을 먹이기 위해 만들었다는 유례를 가진 김렛이라면, 해군에 납품하던 플리머스 진 베이스가 되었을 때 잘 어울릴 거라는 기대감을 품기에 충분했다.      


완성된 김렛을 한 모금 마셨을 때 온몸을 찌릿하게 만드는 감각이 신선하면서도 이 느낌이 진짜 김렛이구나 감탄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그가 했던 말뜻이 이해되었다. 필립 말로가 사건과 관련된 여자들과 엮이지 않고, 그가 나와의 좋은 관계에도 불구하고 연인 관계가 되길 주저했던 이유.      


반칠십이 되고 보니 남녀관계에서 일종의 귀찮음을 느꼈다. 귀찮다고 쓴다면 너무 무기력하게 읽히려나. 적당한 거리, 인력과 척력이 잘 유지되는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유지되는 관계에 대한 욕구가 더 커졌다. 섹스는 둘 사이를 친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번거롭게 만들 뿐이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것이다.      


물론 동물적인 순간을 포기한다거나 그 욕구를 부정한 삶을 살겠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섹스가 없다면 더 좋을 수 있는 관계도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간 여자와 남자의 관계로 친밀하게 지낸다면 반드시 섹스로 확인받으려고 한 서툰 애정에 대한 반성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7년 전 그가 했던 말은 김렛처럼 우리 관계를 날카롭게 관통한 말이었고 관계 속에서 서둘러 나를  확인받으려든 내게 해 준 충고였다.      


그림. ㄱㅎㅇ


바텐더는 금세 빈 잔이 된 걸 보더니 자신만의 레시피로 만든 김렛을 한 잔 더 해보겠냐고 물었다. 김렛은 원칙적으로 진과 라임주스를 섞어 만들지만 진 대신 보드카를 넣은 보드카 김렛이 1990년부터 유행했는데, 그 역시 보드카를 베이스로 한 김렛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의 추천이라면 믿고 마셔볼 요량이 생겼다. 이번에는 보드카 2온스에 생 라임 한 개를 통째로 쓰고 장미 시럽을 추가한 김렛이었다. 연한 핑크빛이 감도는 김렛의 맛은 원래의 맛에 조금은 부드러우면서도 로맨틱함을 더한 느낌이었다.      


사랑에 대해 냉소적이게 된 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의 속성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환상에 기대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그런 태도로는 쉽게 사람을 좋아하게 되지 않지만, 그렇기에 좋아하게 된 사람에 대해서는 쉽게 마음이 변하지 않게 된다. 그것이 건조한 거리에 있는 관계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적절한 달콤함이라는 걸.      


장미 시럽이 추가된 김렛은, 그런 맛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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