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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Dec 08. 2015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酒力하다] 스푸모니 Spumoni

  

어머니께서 나쁜 일이 있을 때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것만큼은 꼭 지켜왔다. 우울감에 젖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분을 화사하게 전환시키고 즐거워질 수 있을 때 술을 마셨다. 인생에 추가할 수 있는 즐거움의 옵션이 내게는 술이었다.      


몇 가지 규칙을 마련했다. 한 잔을 마셔도 맛있는 술을 마신다. 혼자 술을 마실 때에는 곁들이는 음식이 있어야 한다. 집에서는 어떤 주종이든 한 잔 이상은 마시지 않는다. 술이 조금 더 당기는 날에는 주저 않고 집을 나선다. 새벽 1시, 자다 깼지만 술이라는 단어가 뇌내에서 반짝 빛을 내면 옷을 대충 주워 입고 나간다. 그럴 때 혼자 가도 어색하지 않고 격식을 지나치게 차리지 않아도 되는 조그마한 바가 필요하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야 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새로운 술을 한 잔 더 마실 수 있는 돈을 택시비로 쓰는 건 아깝다.      


이사를 하고 동네 탐방에 나섰다. 주거지 주변에 혼자 가서 마시기 좋은 바를 미리 탐색하기 위함이었다. 번화로운 거리, 눈에 띄는 곳에 위치해서 크고 화려한 곳보다는 골목 사이에 위치해서 아는 사람들만 찾는 단골 위주의 작고 조용한 바를 선호했다. 그런 마음을 알아주듯 이런 데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있단 말이야? 싶은 곳에 희한하게도 차분히 불빛을 밝히고 있는 바가 존재했다. 그런 곳엔 홀리듯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작은 시장의 구석, 4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작은 바와 테이블이 두 개 정도 있고 사장님 혼자서 운영하고 있는 바를 발견했다. 오픈 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은 바였고 나는 그날의 첫 손님이었다. 첫 잔은 언제나처럼 마티니를 주문했다. 한 입 머금은 마티니가 마음에 들어서 연거푸 들이켰다. 적절히 쌉싸래한 마티니의 맛이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마티니가 만족스러울수록 솟아올라오는 광대와 미소를 숨길 수 없다. 사장님 역시 흐뭇해하는 게 느껴졌다. 몇 잔을 더 마셔도 좋을 바라는 판단이 섰다.      


바가 한가로운 덕분에 사장님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짬뽕의 세계에 불맛이 있다면 칵테일은 얼음 맛인데 전에 일하던 바와 달라진 얼음과 냉동고의 상태 때문에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칵테일 맛을 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며, 오늘에서야 그 해결책을 찾아 마티니를 만들어 보고 있던 참이었다고 했다. 칵테일에도 사소한 균형이 얼마나 맛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 술맛이 확 끌어 오른다. 그래서 두 번째 칵테일은 사장님의 추천에 맡겼다.   

   

사장님은 현재 취기의 정도와 선호하는 맛을 간단히 물어본 다음 한참을 고심하다  붉은빛이 강렬한 리큐어를 집어 들었다. ‘단 건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의구심을 잠 재우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 리큐어와 자몽주스, 토닉 워터를 적당히 섞어 얼음이 든 텀블러 글라스나 사워, 고블렛, 콜린즈 등의 크고 긴 잔에  담아낸 롱드링크 종류의 칵테일이었다.     

 

“스푸모니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에요. 이태리어로는 거품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해요.”    

 



스푸모니는 화려한 색깔과는 다르게 기분 좋은 쓴 맛을 내고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취기를 진정시켜주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독한 마티니를 급하게 비운 나에게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을 걸어주는 느낌이었다. 가끔 술을 마실 때 마시려고 계획한 양을 쉬지 않고 들이킨 뒤 취함의 최고조를 찍어버리는 가학적이고 밀어붙이는 음주 습관을 드러낼 때가 있다. 그날도 빨리 취해버리고 싶었는데 스푸모니는 아주 다정한 방식으로 그렇게 마시지 않아도 기분 좋은 취기를 즐길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상냥한 술이라는 느낌이었다.      


단 맛이 나는 게 아닐까 두려움에 떨게 했던  붉은색의 리큐어는 캄파리였다. 캄파리는 1860년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바텐더를 하고 있던 가스파레 캄파리가 만든 빗테루 아루소 도란디아라는 이름을 붙여서 판매하기 시작한 리큐어로 아들인 다비프레이즈 대에 캄파리로 이름을 바뀌었다. 70여 가지 약초와 향초로 만들어진 비터(bitter)류의 리큐어다.      


스푸모니를 알기 전까지 리큐어는 다른 술에 첨가되는 칵테일의 부재료 정도라고만 생각했는데 리큐어 역시 그 자체로도 매력이 넘치는 술이었다. 리큐어가 메인이 되어 즐길 수 있는 칵테일의 세계도 무궁무진했다.      


캄파리는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광고 포스터를 제작해서 홍보에 열을 올렸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술계와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다양하게 진행했다. 캄파리 컬러인 레드를 활용하여 시대를 앞서가는 파격적인 광고 포스터들을 만들어 냈다. 대부분의 주류 광고들이 술을 마시는 주체인 남성은 근엄하면서도 부유하게 드려내는 반면, 술의 관능적 속성과 여성을 연결시켜 여성의 몸을 관음 하고 소비하게 만드는 데 주력한다면 최근의 캄파리 지면 광고는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캄파리를 즐기는 여성의 곁에 헐벗은 남자들을 배치하여 그녀를 위해 봉사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심지어 미녀가 들고 있는 캄파리 속에서 뿅 하고 나타나는 근육질의 미남이라는 램프의 요정 지니 콘셉트를 차용한 광고 화보도 있다.      


그림 . ㄱㅎㅇ


술을 소비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매혹적으로 묘사하는 캄파리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다른 술보다 좀 더 호감을 품을 수밖에 없다.  붉은빛임에도 쓴 맛을 내는 반전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 캄파리를 내세운 스푸모니는 취기를 조절하고 싶을 때 종종 마시게 될 그런 칵테일이라는 인상이 깊게 새겨졌다.    

   

스푸모니를 비운 내가 한 잔의 칵테일을 더 주문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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