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 내게 물었다.
죽을 건지, 부활할 건지.
그날 이후, ‘아이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으면 좋았을 텐데.
어쩐지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다 집어치우고 죽는 게 낫겠다는 체념이 고개를 들었다.
불행은 나를 진지하게 죽음 앞에 세웠다.
차라리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면 미안해서라도 이런 마음을 먹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채 잡혀 끌려가 맞닥뜨린 불행은 나를 더 처량하고 지치게 만들 뿐이었다.
아마 내가 가정에 대한 마음이 남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혼가정에서 자라며 위축되었던 시간들, 막연히 동경하던 ‘정상가정’의 꿈을 드디어 이뤘다고 믿었던 날들. 그 각별했던 전부가 무너지고 내가 겪은 결핍을 내 아이에게 대물림하게 될 거라는 공포가 나를 막다른 골목에 서게 했다.
매일 죽음의 감정이 치솟았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죽음을 고민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질문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은 끝이 아니라 내가 지나온 삶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삶을 시작하게 하는 훌륭한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파헤쳐보면 결혼생활 내내 갈등이 있었고, 행복했던 순간은 찰나였으며, 그 안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때 그 사실을 직시하지 않았다. 오로지 잃어버린 ‘껍데기’에만 집착했다.
내가 잘못했던 부분은 가정의 결핍이 채워졌다고 느낀 순간, 안주해 버린 것이다.
배우는 일도, 새로운 도전도 아이의 몫으로 미뤄두고 좋은 것은 상대방의 것이 맞다고 수긍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점점 의욕을 잃고 그냥저냥 살았다. 사실 나는 그 안에서 살아있는 줄 알았지만, 스스로를 죽이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나는 이미 난간 밖으로 밀려난 지 한참이었고, 가정이라는 끈을 피맺힌 손으로 붙잡고 버틴 꼴이었다. 그러다 상대방에 의해 싹둑 끊어지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내가 떨어진 불행의 바다는 저 시커멓고 깊은 심해가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보다 차갑지도, 깊지도 않은, 겨우 발목까지 오는 얕은 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내가 언제든지 일어나 아이의 손을 잡고 찰박찰박 걸어 나올 수 있는 뭍 가까이였다는 것을 말이다.
불행은 직접 몸을 던져봐야 명료해진다. 추락하는 그 찰나의 무서움이 너무 커서 인생 전체를 포기하고 싶어지게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 속에서 키워온 공포만큼 크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불행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거대하게만 보여 벌벌 떨었던 것들이 실제로 겪고 나면 돌연 시시해지기도 하는 것처럼.
그러니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느닷없는 이별도, 아픔도, 가난도, 심지어 죽음조차.
불행의 형태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그 답은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그러니 죽을 각오로 보란 듯이 부활하자.
남 보란 듯이가 아니라 나 보란 듯이 말이다.
더 화려하게, 더 많이 갖는 삶이 아니라,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붙들고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을 아는 삶으로. 그러니 나를 위해, 내가 다시 세운 기준 위에서 다시 한번 뜨겁게 살아보는 거다.
어차피 우리는 조금씩 죽어가고 매일 무언가를 잃어가며 살아가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존재들이니까.
그런 관점에서 부활은 특별한 기적이 아니라,
누구나 불행의 문턱에서 선택할 수 있는 보편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 앞에서 한 번쯤, 아니 여러 번 거역할 수 없이 치열하게 통과하며 기어이 다시 살아내기를 반복하는, 누구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운명적 기회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