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지 말아야 할 불행

by 한밤

갑작스러운 불행은 냉정을 잃게 만든다.


그의 유책을 알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무엇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지 머릿속에서는 수십 번이나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고 아이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모든 결심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아이를 위해 참는다”는 말은 윗세대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내 일이 되기 전까지는, 그런 선택을 했다는 지인들의 사연과 기사를 보며 안타까워하면서도 한숨을 섞던 나였다.

아이는 금세 내 표정을 읽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아마 나는 울음을 간신히 붙든 얼굴과 분노를 억누른 얼굴을 동시에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빠가 오면 밖에서 이야기를 하고 오겠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고 평소보다 이른 저녁을 먹인 후 상대방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생각은 몇 번이나 방향을 바꿨다. 그래도 일단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도 당황했을지 모른다,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살아온 세월과 아이가 그 모든 것을 붙드는 명분이 되어주었다.

나는 그렇게 아이를 인질 삼아 내 불행을 방치할 정당성을 찾고 있었다.

단순하게 지금 경제력이 없고, 아이는 무섭게 커가며 그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쨌든 시간이란 게 필요하니까 내가 자리 잡을 때까지는 아이를 위해 참아보자고 그게 현명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러나 퇴근 후 돌아온 그는 분기탱천한 얼굴이었다.

“이 가정이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다.”

적반하장으로 어깃장을 놓았다.

기다린 게 면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가 긴 시간을 고민해 내린 결론은 모든 책임을 나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이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가소로울 정도로 허망한 선택이었다.

내가 정작 무서웠던 건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 다정한 남편과 아빠를 연기하던 그의 가면이었다.

결국 밖에서 얘기해야겠다는 내 결심은 무산되었고 그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자기 합리화를 늘어놓았다. 끝까지 참은 건 자신이고, 내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떵떵 큰소리치는 그를 기막힌 얼굴로 바라보아야 했다.

눈과 귀가 멀고 중년남성에게 트라우마까지 있는 내 작은 강아지는 본능적으로 바들바들 떨면서도 내 앞을 힘껏 지키며 짖고 있었다.

그 애처롭고 절절한 비애에도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내 아이를 위해 참는다는 일념으로 이 상황을, 핏대 높여 하고 싶은 말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때 아이가 방문을 밀고 나왔다. 당연히 우리 집은 대저택이 아니기에 그가 한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아이 입장에서도 부당하게 느꼈는지 아이는 아빠의 등을 치며 그만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놈이 이성을 잃고 아이를 노려보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 찰나에서야 아이를 위해 참는다는 말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아이를 위해 절대 참지 말아야 할 상황이 온 것이다.

나는 분연히 일어섰다. 아이를 건들면 가만 안 두겠다고 소리치며 아이 앞을 막아섰다.

그의 찌그러진 면상을 당장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었다.

그는 더 이상 아빠도 남편도 뭣도 아니었다.

상대는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아이와 내 앞에서 결혼액자를 바닥에 수십 번 내리쳐 부쉈다.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 행복하게만 웃고 있던 젊은 우리의 얼굴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갔다.

나는 충격에 굳은 아이를 방에 들여보냈다.

그 후 육탄전이 오가진 않았지만 우린 말로 서로를 밀치고 때리고 할퀴고 패대기쳤다. 결혼생활 동안 꾹꾹 눌러왔던 독한 말들이 방언 터지듯 쏟아졌다.

뻔뻔한 광기와 비겁한 모습을 보이던 그는 그렇게 집을 나갔다.

나는 왜 조금 더 일찍 눈치채지 못했나. 나는 왜 어리석게도 그놈을 다시 기다리고 망설였나 제대로 판단 내리지 못하고 지나쳤던 의미들과 수많은 후회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아이에게 못 볼꼴을 보였다는 죄책감이 지금도 가슴 깊은 곳을 찌른다.

아이는 인질이 아니었다. 결코 인질이 되면 안 됐다.

그날 깨진 건 액자만이 아니었다.

아이를 위해 참는다는 말은 아이를 위해 참지 못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산산조각이 났다.

그 말은 결국 나와 아이까지 불행 안에 가두는 모순이었다.

결혼액자도, 상대방도, 불행에 묶어두던 말도 모조리 박살 나서야 깨달았다.

부서진 파편 위로 피맺힌 발을 내딛고서야 나는 참아내는 엄마보다, 불행에 맞서 일어서는 엄마가 아이에게 더 필요했다는 것을 깨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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