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엄마는 한 편의 막장 드라마 같은 현실을 끝내고 이혼을 선택했다. 그땐 이혼이라는 말 자체가 드물던 시대였는데 엄마는 끝내 법정 소송까지 감행했다. 잘못은 상대에게 있었고, 판결도 엄마의 손을 들어주었기에 나는 그 용기와 당당함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소송이 끝나는 날, 엄마는 어두운 얼굴로 내게 신신당부했다.
“절대 이혼 가정이라고 말하고 다녀서는 안 돼.”
혹시나 딸이 누군가에게 업신여김을 당할까 염려되는 당부였지만 어린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잘못한 게 없는 ‘이혼’도 자부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평범한 가정이 아니어서 그저 숨기고 부끄러워해야 할 낙인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날부터 주눅이 든 채로 살았다.
요즘은 이혼이 흔해졌다고는 해도 흠이 아닌 건 아니라서 나 역시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자칫 범죄의 타깃이 될 수도 있지 않나 싶은 걱정도 컸다.
그때서야 엄마의 지난 삶과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예전의 나처럼 내 아이까지 움츠러든 채로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단 소송이 끝날 때까지는 우리만 알고 있자고 말해볼 참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나와 달랐다.
“이미 친구들에게 얘기했는데?”
“… 뭐라고?!”
아이는 동네방네, 심지어 담임 선생님에게까지 엄마 아빠의 이혼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학교 상담을 연결해 주었고 아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처를 야무지게 정리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속이 엉켰다.
잘했다고 말은 했지만 안방에 들어와 혼자 이불킥을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옳았다. 내 불행을 얘기할 수 있는 건 건강한 용기였다.
그래서 나도 마음을 고쳐먹고, 영화 <내 마음의 풍금> 속 전도연처럼 두 손을 입가에 가지런히 모으고 외쳤다.
“나 이혼해요~”
아이 친구 엄마들에게 먼저 입을 뗐을 때, 모두 알고 있는 눈치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도 사실은…” 저마다 하나둘씩 고해성사를 하기 시작했다.
꽁꽁 싸매고 있을 때는 서로 알아볼 수 없던 아픔이 풀어헤쳐지자 눈물과 함께 해소되었다.
그 뒤부터 우리 집 현관 앞에는 김장김치가, 고구마가, 상추와 오이가 철마다 쌓이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썩은 배우자를 도려냈을 때, 그 자리에 매울 수 없는 깊은 구멍이 생길 줄만 알았다. 평생 이 깊고 깊은 심연을 속이 문드러지게 안고 살겠구나 절망했었다.
그런데 배우자를 빼내자 그 구덩이를 김치와 고구마와 상추와 오이가 채웠다.
썩은 배우자는 그 정도 자리였던 것이다.
인간 혐오로 치달을 뻔했던 내 인류애는 그렇게 다시 충전됐다.
브런치는 또 어떤가.
내가 하나를 내어주면 열 개를 주고도 호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기어이 한 개를 덤으로 얹어주는 곳이었다.
나이도, 사는 곳도, 얼굴도 알 수 없지만 나보다 더 깊게 내 글을 들여다봐주며 매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내 어깨를 토닥여주고, 내 품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떠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춘기라 투덜대고 지지고 볶지만 결국 엄마를 찾는, 나와 닮은 듯 다른 아이와 하루도 빠짐없이 무조건적인 황송한 사랑을 주는 반려견. 내 전부를 내어줘도 아깝지 않은 존재들이 여전히 내 곁에 있다.
돌아보니 나는 잃은 것이 없었다.
이렇게 완벽한 불행이 있나 싶을 만큼.
한밤의 동그란 프로필을 보면 그저 까만색일 뿐이다.
하지만 클릭해 보면 수많은 별이 빛나는 아름다운 밤하늘이 담겨 있다.
눌러보지 않으면 모른다.
불행도 이와 같다.
불행이라는 단어에는 칠흑 같은 어둠과 눈물, 티얼스(tears)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천만에, 불행에는 수없이 반짝이는 밤하늘과 치얼스(cheers)가 찰떡궁합이다.
어찌 내 불행에 건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오늘 밤은 눈물을 그치고, 모두의 빛나는 불행에 치얼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