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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선 Dec 15. 2023

금사빠의 사랑 이야기 1탄

Step 01. 사랑에 빠지기

사랑에 빠지는 건 쉬웠다. 사랑을 줄 대상과 그럴듯한 분위기만 있으면 말이다. 행인 1에 불과하던 사람이 갑자기 귀여워 보이거나 섹시해 보이거나 멋져 보이면 그게 시작이었다. 특정 행동에 의해서도 아니었고, 그 행동이 실제로 귀엽거나 섹시하거나 멋져서도 아니었다. 심지어는 나를 향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스쳐 지나갈 법한 어떤 한 장면을 내가 포착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그렇게 보이지 않던 사람도 그렇게 보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그다음은 우리가 ‘진짜 우리’가 될 만한 분위기에 갇히는 것이었다. 누구 하나 보고 싶다고 말하거나, 집에 가기 싫다고 말하거나. 톡 치면 흘러넘칠 듯한 소주잔처럼, 두근거리고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마음을 고백하는 쪽은 보통 나였다. 그러면 나는 그 순간부터 점점 더 사랑에 빠지고 만다.


나의 첫 연애는 당돌했다. 스물한 살, 대학에 갓 입학해 처음으로 나간 미팅에서 한 남자애가 눈에 띄었다. 180cm가 넘는 키에 뽀글 머리, 그러나 아무도 탐내지 않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어리숙한 그 남자애는 자신이 동전을 준비해 왔다며 이걸로 짝꿍을 정하자고 말했다. 그의 길쭉한 손 위에 놓인 각양각색의 동전이 웃겼다. 그리고 그걸 진지하게 고르고 있는 애들 사이 우뚝 선 뽀글 머리가 귀엽게 보였다. 그래서 그가 화장실 간 틈을 타 친구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나 쟤가 마음에 들어!”


친구들이 말했다. “왜…?”


그렇게 그는 암묵적으로 나의 짝꿍이 되었다. 우리는 무려 4:4 미팅을 했는데, 8명이 모두 차분함 속에 감춰진 광기를 분출하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나는 종종 그에게 기댈 듯이 웃고, 눈을 연신 마주치고, 옷깃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헤어질 때 다른 아이들에게는 ‘잘 가라!’라고 호탕하게 말했지만, 그를 보고는 ‘연락해!’라며 수줍은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가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들어갔냐며. 다음 날에는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8명이 다 함께 보고 싶다는 건지 그가 보고 싶다는 건지 두루뭉술하게 말이다. 그렇게 그는 일주일 만에 나의 진짜 짝꿍이 되었다.


급속도로 사귄 것이 무색하게 우리는 3년이 넘는 긴 시간을 만났다. 중간에 6개월 정도 헤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그 사이 짧으면 3주, 길면 2개월까지 누군가를 또 알차게 만났다. 탈북한 스물일곱 살 오빠도 만나고, 화이트데이라며 사탕을 한 박스 사다 준 스물네 살 오빠도 만났다. 줄 사랑은 없는데 상대만 찾아 나서던 이 시기는 내 인생 가장 깜깜한 암흑기와도 같았다. 주는 사랑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면서 상대를 만나면 모든 게 충족되리라 잘못 믿고 있을 때였다. 모두가 내게서 떠난 뒤, 나는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멍을 때리다 저녁이 되면 아무랑 약속을 잡아 술을 먹으러 나갔다. 시간이 흘러 나의 생활을 다시 찾을 때쯤 나는 나의 첫사랑을 다시 만났다. 그와 함께한 몇백 일이 처음보다는 훨씬 행복하고 안정감이 있었지만, 나는 곧 줄 사랑이 바닥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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