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은 언제나 빠르고, 이해는 늘 뒤늦게 온다
"(...) 너도 알지만 난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안락한 가정이야. 그리고 콜린스 씨의 성격과 집안 배경,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해 볼 때, 내 생각엔 우리에게도 다른 어느 커플 못지않게 행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
(...)
결혼에 대한 샬럿의 견해가 자기와 꼭 같지만은 않다는 건 그녀도 언제나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녀가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더 중요한 다른 것들을 희생시킬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콜린스 씨의 아내인 샬럿, 정말로 창피스러운 그림이었다!. 그리고 친구가 창피스러운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실망시켰다는 것도 가슴이 아팠지만, 마음을 더 무겁게 한건 샬럿이 자기 스스로 선택한 운명 속에서 웬만큼이라도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P. 180-181 민음사
세상에는 수 없이 다양한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결혼의 형태가 있다.
엘리자베스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
오늘의 <오만과 편견>은 나를 십여 년 전으로 데려간다. 결혼을 준비하던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 안에는 당시의 나도 포함되어 있다.
한 친구는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 졸업 후 다시 본가로 들어가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서른을 훌쩍 넘겨서야 독립을 결심했다. 친구가 선택한 독립의 방식은 다름 아닌 결혼이었다.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했고, 그곳에서 연결해 주는 만남에도 빠짐없이 나갔다. 그 친구를 따라다니다가 나 역시 몇 번은 꽤 흥미로운 경험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지금의 남편을 만난 건 소개팅도, 결혼정보회사의 주선도 아니었다.
당시 막 유행하기 시작한 ‘정오의 데이트’라는 데이트 앱에서였다.
친구는 몇 가지를 차분히 따져보았다고 했다. 돈에 대한 관점, 부모님의 노후, 경제 문제, 정치적 생각까지—정말 중요하다고 여기는 키워드들 위주로 이야기를 나눴고, 결론은 “적당하다”였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걸 친구는 잘 알고 있었다. 대신 두드러지는 단점들조차 자신의 상황과 비교해 보았을 때 감당 가능했고, 오히려 서로 닮아 있다는 점에서 안심이 되었다고 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초식남’이라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고도 했다. 게임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술 담배도 안 하는데, 충분히 봐줄 수 있다고 했다.
계획대로 친구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다. 독립을 선언한 지 약 6개월이 걸린 듯했다.
결혼 전, 남편과 세워두었던 생활의 목표들도 하나씩 착착착- 이루며 살고 있다.
단 한 번도 친구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은 적은 없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친구는 분명 지금의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친구가 독립을 위해 결혼을 선택했을 때,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능하다 해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 여겼다. 너무 위험한 선택을 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며 말한 적도 있다.
돌이켜보면 나의 결혼한 친구들은 모두 각기 다른 이야기와 경로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누구는 소개팅으로, 누구는 헌팅으로, 누구는 세입자와 전 세입자의 관계로, 누구는 오랜 캠퍼스 커플로, 또 누구는 친구에서 연인으로.
어제 분명히 다짐했었다. 엘리자베스를 조금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자고.
그런데도 친구의 결혼을 ‘창피하다’고 여기는 엘리자베스를 다시 만난 오늘, 나는 또 한 번 무심코 혀를 차고 만다.
엘리자베스가 진짜로 모르고 있는 건 결혼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사람마다 행복에 도달하는 경로가 다르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녀 역시 자신의 판단을 부끄러워하는 시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오늘의 『오만과 편견』은 엘리자베스보다는 어른이 된 내가 엘리자베스를 꾸짖으며, 동시에 나에게 보내는 조용한 경고이기도 하다.
"판단은 언제나 빠르고, 이해는 늘 뒤늦게 온다"는 사실을 경험과 책으로부터 배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