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기는 법보다 나를 속이지 않는 법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좀 전에 클레이 부인이 않아 있던 쪽을 바라보았고, 그럼으로써 자기가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하 고 있는지를 분명히 했다. 앤은 그가 자기와 같은 종류의 자 부심을 갖고 있다고는 믿지 않았지만, 그가 클레이 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기뻤다. 그가 클레이 부인을 물리치려는 목적에서 아버지와 상류 계급 사람들의 만남을 적극 장려하는 것이라면 그녀의 양심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 민음사
“그가 자기와 같은 종류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는 믿지 않았지만, 그가 클레이 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기뻤다.”
이 문장을 읽다가 나는 잠시 생각이 많아졌다. 앤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는 클레이 부인이 앉아 있던 쪽을 바라보며 은근히 암시를 남긴다. 더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유용하리라는 말. 겉으로는 품위와 사교에 대한 조언처럼 들리지만, 실은 한 사람을 밀어내기 위한 계산이 숨어 있다.
앤 역시 그의 계산을 알고 있다. 그리고 동의한다. 하지만 그와는 다른 생각에서다.
그가 클레이 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그 계산이 클레이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라면, 앤 자신의 양심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클레이 같은 사람이 싫다.
아첨을 전략처럼 사용하고, 관계를 디딤돌로 삼고, 모두의 이익을 말하는 듯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사람. 앨리엇의 허영을 이용하는 모습, 진심보다 목적이 먼저 보이는 말. 클레이의 친절은 거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클레이가 완전한 악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생각이 많아진다.
그녀는 대단한 계략가도 아니고, 타인을 파멸로 이끄는 악랄함도 없다. 그저 기회가 많지 않은 세계에서 가장 현실적인 방식을 택한 여자일 뿐이다. 생존을 위해, 더 나은 자리를 위해 계산하는 사람.
그런데, 그런 사람은 소설 속에만 존재하지 않기에 앤의 태도에 많은 생각이 머무르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다.
우리는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메리처럼 자기중심적인 불편함을 가진 사람들, 클레이처럼 계산이 먼저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때로는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어딘가 한두 군데씩 불편한 면을 지닌 사람들과 섞여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사이의 관계가 더 어렵다.
누군가를 완전히 배척하기에는 그들도 나처럼 평범하고, 완전히 신뢰하기에는 어딘가 마음이 걸린다.
지혜롭게 거리를 두고, 지나치게 냉소하지 않으면서도 순진하게 이용당하지 않는 균형을 잡아야 한다.
나는 계산적인 사람이 싫다고 말하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나 역시 온전히 계산하지 않을 자신 또한 없다.
앤이 그랬듯이, 나 또한 목적이 정당하다 느껴지면 수단을 조금 완화하고 싶어 질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할 사람은 어쩌면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것이다.
복잡한 세상과 어지러운 관계 속에서,
나는 세상을 이기는 법보다 나를 속이지 않는 법을 배우고 싶다.
누군가의 계산을 비판하기 전에, 내가 무엇을 정당화하고 있는지 먼저 묻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