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점수(頓悟漸修):깨달음은 순간이고, 삶은 과정이다

by Nova G
하지만 난 월리스 부인을 상대로 돈을 벌 작정이에요. 지금 내가 만드는 비싼 물건들을 모두 그 여자에게 팔 생각이거든요. - 228p. 민음사


앞부분에서 스미스 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고난을 통과하며 분명한 삶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재산을 잃고, 병으로 고립된 상황 속에서 세상의 허영을 통찰하고, 인간관계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훌륭한 인물이 등장했다고 여겼다. 앤과의 관계를 살펴봐도 그렇고, 앤을 대하는 태도도 맑은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비싼 물건을 만들어 월리스 부인에게 팔겠다” 라고 말하는 순간, 책을 읽다가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멈췄다.

나는 스미스 부인에게 실망을 했던걸까? 그렇지 않다. '아, 이사람도 결국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친밀감이 더해졌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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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통과하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통해 배우는 점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모든 고난이 사람을 성인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고난을 통해 통찰을 얻을 수는 있지만 생존의 욕구까지 제거하지는 못한는 것이 현실이다. 스미스 부인도 삶의 우여곡절을 지나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여전히 가난하다. 세상을 바로보고 깨우친 것들이 많아졌을지 몰라도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초월하지는 못한다. 여전히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로 씨름을 해야 하며,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스미스 부인은 윌리스 부인의 허영을 정확히 알고 전략적으로 이용한다.


우리의 주인공 앤과 도덕성을 지키는 결이 같은 사람인 듯 하지만 둘의 태도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

도덕적 성숙과 현실의 태도는 반드시 같은 방향을 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고난을 통과하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기대를 품는다.

이제 세속을 초월했을 것이라고, 욕망을 내려놓았을 것이라고. 그러나 한낱 인간에게,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스미스 부인은 성자가 아니었다. 성자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적으로 더 위로를 받는 쪽은 늘 완벽한 성자가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해서 곧바로 그 깨달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무엇인가를 깨닫는 순간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인 적이 많다.

알았으니 바뀌어야 하고, 깨달았으니 이제 좀 다른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삶은 마음 먹는다고 그렇게 곧장 움직이지 않는다.

머리로 먼저 이해하고, 한참 뒤에야 몸이 따라오는 경우가 더 많다. 늦게라도 따라오면 다행이다.


그러니 깨달음 이후에도 여전히 현실적인 나 자신을 너무 쉽게 실망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3월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늘 더 나아진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데

이런 글을 쓴다는 게 아이러니하고, 또 나를 몰아붙이게 만들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좀 그러면 어때” 하고 쉬어가고 싶다.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이 떠올랐다. 한순간 깨달음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해서 곧바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방향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어도, 그 방향대로 살아내는 일은 시간을 들여 차츰 닦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좀 그러면 어때”라고 말하는 태도는 결국 점수를 인정하는 마음이다.
이미 깨달았으니 완벽해져야 한다고 몰아붙이는 대신, 아직 따라오지 못한 나의 속도를 허락하는 일.

오늘의 나는 이미 한 번쯤 돈오했고, 지금도 여전히 점수 중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실패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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