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의 앤 엘리엇과 나의 어긋난 자존심에 대하여
이 모든 것들은 적어도 그의 마음이 그녀에게 돌아오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었다. 노여움과 분개와 회피의 단계는 지나갔고, 그런 감정들이 단순한 우정과 전경이 아닌 과거의 부드러운 감정, 그렇다, 과거의 부드러운 감정의 일부로 대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는 그의 변화가 그 이하의 것을 의 미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270p. 민음사
그에게 처음 연락이 온 건 헤어진 지 한 달이 넘은 뒤였다. 이별을 통보하고 잠수한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보내온 메시지는 짧았다.
“미안해. 그동안 너무 바빴어.”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인지.
화를 냈어야 했는데, 아니면 그냥 무시해버렸어야 했는데 나는 그의 연락에 다시 설레고 있었다. 그 설렘을 죽이려고 얼마나 애써야 했던가. 나는 그에게 다시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멀어지지도 못했다. 그의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연락을 허용한 뒤로 나는 계속해서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순간 이미 관계의 중심은 다시 그에게로 기울어 있었다. 그는 단지 연락을 했을 뿐인데, 나는 밤을 새워 그 의미를 해석하고 있었다.
그는 알지 못한다. 내가 그렇게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나에게 빚진 것이 있으니, 이번에는 그가 더 용기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그의 연락에는 늘 차갑게 대했다. 무심한 척하다가 이틀이나 사흘쯤 지나 답장을 보냈고, 밤 열두 시가 넘어오는 메시지에는 절대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태도와는 달리 내 마음은 여전히 그의 연락에 휘둘리고 있었다.
왜 연락했을까.
왜 이제 와서 전화를 했을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따져 묻지도 못할 질문들을 밤새 반복했다. 머리로는 그를 다시 받아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장면을 상상했다. 그가 조금 더 다가온다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한다면—나는 못 이긴 척 다시 그를 만나게 될까. 그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 속에서 혼자 밀고 당기기를 하며, 이미 스스로 내팽개쳐버린 자존심을 지켜보겠다고 도도한 척하고 있었다.
깨진 믿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와의 로맨스를 다시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한 채 내 주변만 맴돌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보다 나 자신 때문에 더 괴로웠다.
몇 번이고 내 마음만 휘저어놓던 그를 나는 결국 한순간에 차단해 버렸다. 여지를 준 것이 나였는지 그였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남녀 사이에 끝내 좁혀지지 않는 거리는 더 이상 질문을 남겨서는 안 된다.
소설 속에서 앤 엘리엇은 프레더릭 웬트워스의 작은 변화 속에서 사랑의 귀환을 읽어낸다. 노여움이 사라진 것 같고, 회피가 줄어든 것 같고, 말투가 부드러워진 것 같다. 그 ‘같고’들을 하나씩 모아 모아 마침내 ‘틀림없다’는 확신으로 바꾼다. 나는 그 장면을 씁쓸하면서도 설레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앤에게 계속 말을 건다. 착각하지 말라고.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남자는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다가오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대신 해석해 주며 사랑을 연장하지 말라고.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결국 해피엔딩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어쩌면 나는 소설 속에서조차 쉽게 마음을 풀어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소설 속 사랑 이야기 앞에서도 이렇게 자존심을 세우는 걸 보면, 사람은 끝내 자신의 기억으로 소설을 읽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