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을 읽다 떠올린, 한 친구와 끝나버린 이야기
자신이 꼭 완수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은 잃었지만, 대신 최소한 자신의 입장에서 사태의 전모를 앤 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위안을 얻을 수는 있었다. -305p. 민음사
사랑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기회는 얻었다는 문장. 그 한 줄을 읽다가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우리 과에는 일명 '찝쩍남'이 있었다. 공대라는 특성상 여학생이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른 과 보다는 여학생이 월등히 많았다. 우리 과 여학생들 중에는 그 남자의 고백을 한 번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외모도 준수한 편이었고 성격도 좋았다. 과 대표를 할 만큼 리더십도 있었다. 그런데 정말 왜 그렇게 기회만 되면 여자들에게 고백을 하는지, 그의 진실함이란 우리 과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그만의 철칙이 있었는데 절대 애인이 있는 여자에게는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 어제 헤어진 경우라도 그는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우리 과에는 그의 대시를 받아보지 않은 여자가 없었다. 물론 연애 중인 여자는 빼고.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다더니 그 말이 무색하게, 내 고등학교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그와 인연이 닿았다.
내 친구 A는 B와 썸 타는 관계였다. 사실 A가 계속 튕기고 있었지 거의 사귀는 사이였다. B와 그는 친한 친구사이였다. 그래서 A와 B와 그, 이렇게 셋이 함께 어울리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B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 A는 황당해했다.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실연당한 기분이라고 했다.
B의 공식적인 연애가 시작되자마자,
그가 A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며 단둘이 만나자고 했다. A는 내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오늘 저녁에 그가 보자는데, 무슨 얘길까?”
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오늘 너한테 고백할 거야.”
A는 웃어넘겼다.
“에이, 설마. B랑 나 사이가 애매하긴 해도, 둘은 친구잖아. 그냥 날 위로해 주려는 거겠지”
하지만 내 예상이 맞았다.
그날 밤, A는 놀란 목소리로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어떻게 그런 일을 짐작했느냐고. 나는 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들을 차분히 전했다.
그 뒤로, A는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거리 두기가 아니라, 고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나를 배제했다. 나는 몹시 상처받았다.
“너는 친구로서 해줘야 할 말을 마땅히 해줬어. 나라도 너처럼 했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A는 나에게 상처만 주고 멀어져 갔다. A는 그와 결혼까지 했다.
어제도 그렇지만, <설득>을 읽다 보면 괜히 속이 쓰리다.
제인 오스틴의 세계에서는 진심이 결국 돌아오고, 설득은 오해를 풀며, 사랑은 다시 이어진다.
하지만 나의 현실은 이상하리만치 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내 친구 A는 나에게 왜 그랬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좋다고, 그와 사귀게 되었고, 결혼한다고 왜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나는 내 행동이 잘못된 것이었는지 몇 번을 생각하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나의 상처와는 상관없이 A는 결혼해서 잘 산다고 한다. 아니, 정말 잘 사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다른 친구들을 통해 건너 건너 소식을 들을 뿐이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A가 잘 살지 못할 이유는 없다.
내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이 그녀의 삶까지 불행하게 만들 이유도 없고,
내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이 그녀의 삶을 바꿀 이유도 없다.
결국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가끔 생각한다. 우리가 정말로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까 하고.
나는 앤처럼 기다린 적도 없고, 누군가를 조종하려 한 적도 없는데, 결과는 나만 관계 밖으로 밀려난 쪽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더 서글프다.
생각해 보면 인간관계에는 종종 설명되지 않는 단절이 생긴다.
누군가가 분명히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서로의 세계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관계들.
소설 속 인물들은 마지막까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설명하고, 이해한다.
하지만 나의 현실의 관계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어떤 관계는 이유를 충분히 말할 기회조차 없이 끝나버린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사람 사이의 관계는 옳고 그름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감당할 수 있는 거리 위에서만 지속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날 조금 더 먼저 알아차렸고, A는 그 사실을 끝내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끔은 생각한다.
만약 그날의 대화가 조금 달랐다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좋은 친구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소설 속에서는 어딘가에서 다시 만났을 두 사람이, 현실에서는 그렇게 조용히 사라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