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머릿속은 자신이 놀라움 속에서 목격한 초대장과 그것을 받는 사람의 반신반의하는 듯한 표정, 고맙다기보다는 의외라는 반응, 수락이라기보다는 공손한 승인의 인사로 곽 차 있었다. 그녀는 그를 잘 알았다. 그의 눈에서경멸을 보았고 그가 과거의 모든 무례함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그따위 선물을 선뜻 수락하리라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기운이 빠졌다. -328. 민음사
앤은 다시 흔들리고 있다.
한때 사랑했지만 스스로 놓아야 했던 사람 앞에서, 그녀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그의 눈빛 하나, 잠깐 스치는 표정 하나에도 마음이 무너진다. 그것은 비굴함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한 번 스스로 포기했던 사랑이기에, 이번에는 또다시 잘못 읽고 또다시 잃게 될까 봐.
게다가 그녀가 서 있는 자리는 결코 편안하지 않다.
허영과 체면으로 가득 찬 집안, 그 중심에 서 있는 아버지와 언니. 그들 곁에서 앤은 늘 한 발 물러나 있다. 가족의 태도가 혹여 그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을지,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그들의 속물적인 기준에 휘둘리지는 않을지, 그녀는 혼자서 마음을 졸인다.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며 답답해졌다.
사랑 때문에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이 초라해진다고 느껴진다면, 나는 그 사랑을 선택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움츠러드는 관계라면, 나는 먼저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상하게도 감사해졌다.
나는 저런 공기 속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이. 체면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부모님과, 비교 대신 농담을 건네는 가족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앤의 자리에서 사랑이 나를 작아지게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앤처럼 끝까지 견디며 그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아니면 나를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서 돌아설까.
어쩌면 사랑은 두려움을 견디는 일일지도 모르고,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자리에서
누구도 초라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