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이 연민으로 바뀌던 날, 그 뒷모습에서 내 엄마를 보았다
매년 시 외할머니 생신에 경주를 갈 때마다 남편은 말했었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매번 조금의 걱정을 안고 할머니를 찾지만 그래도 늘 생각보다 정정하신 모습 때문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그해에도 시월이면 경주를 가겠지 생각했지만, 무더위가 한풀 꺾여갈 때쯤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시월의 단풍 대신 팔월의 뙤약볕 속에서 마주한 경주는 낯설었다. 풍경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의 표정도 낯설었다.
입관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정리하던 복도에서 시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혼자서 조용히 울고 계셨다. 소리 없는 울음이었으나, 그 적막한 떨림은 그 어떤 비명보다도 크게 복도를 채우고 있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축 처진 어깨를 안아드리고 싶었다.
내가 며느리가 아니었다면, 아무 망설임 없이 다가가 안아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슬픔의 가장 가까운 자리는 내 몫이 아님을, 그 곁은 내가 채울 수 있는 빈자리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슬픔이 며느리라는 시선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지 않기를 조심히 바라는 마음이 앞섰다.
조용히 시선을 거두고 실내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분주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형님이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형님은 마른 손수건을 어머니에게 건네고 말없이 어머니의 굽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머니에게는 당신의 무너지는 세계를 지탱해 줄 '딸'이라는 기둥이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더 슬퍼졌다.
그 슬픔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 슬픔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서서히 저물어가는 외할머니와, 그 곁을 지키고 있는 나의 엄마가 있다. 그날의 시어머니 뒷모습은 어쩌면 언젠가 내가 마주하게 될 우리 엄마의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미래의 어느 날, 홀로 슬픔을 견뎌내고 있을 나의 엄마를 미리 본 것만 같았다.
시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느낀 슬픔은 며느리라서 느끼는 감정도, 시어머니라서 달라지는 감정도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의 딸로서, 또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마음일 뿐이었다. 시어머니가 나의 엄마가 아니라서 달라지는 감정이 결코 아니었다.
시어머니가 너무 미워서 괴로웠던 날, 엄마에게 물었었다. 엄마는 어떻게 할머니를 평생 ‘엄마’라고 부를 수 있었냐고, 할머니가 밉지도 않았냐고. 나는 엄마라는 거울을 보며 고부 관계의 낭만을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현실은 그 벽을 넘지 못해 늘 어렵고 힘들었다.
그날, 왜 하필 그 순간에 엄마의 대답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엄마도 할머니가 미운 적 많았지 왜 없겠니. 근데, 엄마는 할머니를 한 여자로 생각했어. 나와 같은 여자. 그러니 할머니가 참 가엽더라고.”
엄마는 엄마만 알고 있는 이야기인 것처럼 말을 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한테 그러더라. 고맙다면서, ‘너는 좋은 며느리이기도 했지만, 너는 내 친구였고, 애인이었다. 고맙다.‘라고.”
나는 과연 엄마가 걸어온 그 길의 언저리에라도 닿을 수 있을까. 엄마의 말을 이해하고 그렇게 살아볼까 마음먹어 보지만 이내 머리를 절레절레 젓는다. 머리로 이해한다는 것과 실행한다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차이다.
하지만 엄마의 말은 어려운 관계의 해답을 찾는 데 분명한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나 역시 문득문득 시어머니가 많이 가엽다. 시어머니는 당신이 나에게 어떤 생채기를 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그 흉터를 들여다보며 몇 번이고 다시 아파한다. 어쩌면 내가 두려운 것은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던 그 삶의 궤적 안으로 나도 모르게 걸어 들어가 무릎을 꿇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다.
우리는 용서라는 행위 앞에서 많은 조건과 이유를 갖다 붙인다. 그것들을 다 충족시켜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상대방이 수없이 용서를 빌어도 용서할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하지만 용서는 ’그냥‘ 하는 거라고 한다. 어느 날 예배 중 목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시어머니를 떠올리며 많이 울었다.
'저는 못해요, 안 해요! 내 안에 쌓인 이 많은 상처는 어떻게 하나요'
억울하다고 따지며 울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내 마음을 갉아먹던 미움보다 그분을 내버려 둘 수 없는 가련함이 아주 조금 더 커져 있음을 느꼈다.
또 한 번은 교회에서 꼭 전도하고 싶은 사람과 사연을 나누고 중보기도를 하기로 했을 때 나도 모르게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를 적고 있었다. 그 마음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른 채, 그런 나를 보며 또 한 번 울었다. 내 마음속에 그분들은 이미 밀어낼 수 없는 가족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소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시어머니와 나는 과연 가족이 될 수 있는지,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지, 또 어디까지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직도 명확히 잘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나는 더 이상 ‘며느리’라는 자리 안에서만 시어머니를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시어머니도 누군가의 딸이었고, 서툰 사랑을 했던 사람이었으며, 나보다 앞서 엄마의 길을 걸어온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간다.
그래서 여전히 어렵고 조심스럽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쉽게 단정 짓지 않는다. 관계라는 것이 꼭 마주 보고 가까워지는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은 아님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정한 이해란, 억지로 거리를 좁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그림자가 밟히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거리에서 조금씩 덜 미워하며 나란히 걷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끝내 시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지는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시어머니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한 사람을 이해해 보려는 마음만은 놓지 않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