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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브란스 병원 들렸다가 상담 받으러 노박사님한테 갔는데 박사님께서
“시우는 나한테 슬프고 안 좋은 일보다 괜찮고 좋은 것만 말하려고 해.”
라고 하셨다
내가 너무 나의 아픔, 상처에 대해서 회피하고 외면하는 걸 수도 있다는 것을
‘난 괜찮아. 난 좋아’ 라며 정말 그 안에 있는 슬픔들을 감추고 숨기고 꽁꽁 싸메는 걸지도 모른다
이런 행동들이 결국에는 쌓이고 쌓여서 폭발한다는 걸 알면서도 역시나 오늘도 난 괜찮다고 만 한다
사실 난 안 괜찮은데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더 괜찮지 않을 수도…
중학교 1학년 때 성대마비가 온 이후로 자존감이 떨어진 나는 학교 등교하기를 거부했다. 결석일수가 늘어나자 걱정이 된 엄마는 나를 상담센터에 데려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상담사는 학교를 '왜' 가지 않으려고 하는지 보다 '학교'를 왜 가지 않으려는 것에 중심을 두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보다는 내 행동을 고치려는 태도가 거북했던 나는 결국 삼개월을 끝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그 후 중학교 3학년이 된 나는 5군데의 상담센터를 거처 우연히 강남의 한 청소년 상담센터에 정착하게 되었다.
금색으로 이름이 적혀있는 문을 열고 상담실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노박사님에게 짧은 목례를 한 뒤 안락한 쇼파 위에 앉았다. 잠시후 내 앞 의자에 노박사가 앉았다.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박사님이 꺼낼 이야기를 기다렸다.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박사님의 물음에 나는 시선을 돌려 지난 주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특별히 한 것도 없고, 뭐 어디 나가지도 않았고..' 내 일상은 저번주 박사님에게 얘기한 날들과 다를바 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나는 박사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똑같았았어요. " 내가 더 이야기 하기를 이끌려던 박사님은 수녀님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인자한 그의 눈빛에 나는 말을 더 꺼내다가 입을 다물었다.
'딱히 얘기할만한게 없는데...'
한 주에 한 번씩 상담을 받았다. 박사님을 처음 만났을 당시 나는 내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만든 가면 뒤에 숨은 채 최대한 웃으며 감정들을 숨기려고 애썼다. 박사님과의 대화 속에 나는 '괜찮습니다.' 혹은 '...네'로 솔직한 나의 심정을 말하기를 회피했고, 박사님의 날카로운 질문들에는 '..모르겠어요.'로 일관하며 깊이 생각하기를 꺼려했다. 나의 단조롭던 대답들은 다음에 올 모든 말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겨우 추스린 내 온도를 망치고 싶지 않았던 방어적인 태도에 박사님과 나 사이에는 정적이 많이 흘렀다.
내 딴에는 정말 모르겠어서 대답한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내 어둡고 음침한 감정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선생님은 낯을 많이 가리는 내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 주면서도 한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내 병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털어 놓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박사님과 상담을 하면서 신뢰감을 쌓아 점점 내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박사님은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나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며 내가 조금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도와줬고, '내 삶은 고통스럽다'로 끝나는 게 아닌 '그래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 adityaries, 출처 Unsplash
상담을 마치고 나오면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처럼 항상 속이 후련했다. 친한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걱정들과 병으로 인한 고통들이 박사님 앞에서는 잠금 해제된것처럼 풀려났다. 머릿속으로만 정리했던 아픈 기억들이 막상 꺼내보면 별 것 아니라는 사실과, 가슴 속에 묵혀두었던 썩어빠진 감정들이 생각보다 거대했던 심연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꺼낼 때면 박사님 앞에서 눈물 흘리지 않을 거란 다짐도 무색하게 곧 눈물을 머금었다.
차근 차근 내 감정들을 되짚어 보며 나는 내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무엇보다 나는 나에게 자비로워야 된다는 걸 알게되었다. 나는 과거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해도 좋고, 몇 달을 텔레비전만 보면서 현실 도피해도 괜찮다. 물건을 던지면서 미치광이처럼 분노해도 괜찮고, 세상 떠나가라 서럽게 울어도 된다. 나는 나에게 '이러면 안돼.'하면서 완벽한 사람의 기준을 세워놓고 이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나를 쓸모없는 쓰레기처럼 취급하며 비난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나는 지금껏 허상을 쫓고 있었다. 더 상냥하고, 정중하며, 우아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도 된다. 나는 나처럼 사는 법을 생각해봐야한다. 철 없는 애처럼 굴어도 된다. 아직 어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