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죽음을 원하나시요?

: 죽음, 꽃 잠 강의를 듣고

by 오뉴월의 뉸슬

어떻게 죽을 것인가Being Mortal 저서를 쓴 보건대학교수이자 보스턴 브리검 외과의사인 아툴 가완디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병원에서 보내며 죽음을 회피하려는 이들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죽음이 필수적이라면 우리는 과연 어떤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나이를 먹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른다. 냉혹하기 그지 없는 중환자실에서의 안식은 우리를 죽음으로 부터 구해주지 않는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쳐본 첫날에 나는 어느 한 장례지도사의 강의를 어렵게 신청할 수 있었다.







강의는 '프레드릭 북스'라는 동화책 대상 서점에서 진행되었다. 다행히도 책방 건물 안에 엘리베이터가 있어 손쉽게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책방은 불이 꺼져있던 건물 입구와 달리 환했다. 책방 안을 훤히 볼 수 있는 유리문에 나는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다. 마치 저 너머는 덕을 많이 쌓은 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천국처럼 까마득했다. 그러나 곧 책방 문을 열고 나오시는 어머님들에 얼른 들어갔다. 안경을 쓰고 나오지 않아 찌푸린 눈으로 본 강의실 내부는 온통 동화책으로 가득했다. ‘아 여기 동화책만 있는 책방인가 보다. 동화책이 이렇게 많았나.’ 어릴적 안드레센 동화책을 넘기던 기억이 떠올라 오늘 들을 강의가 더 기대되었다.


장례지도사는 자신의 직업과 장례식의 진행방법을 소개한 뒤, 어린이 동화책에 숨겨져 있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했다.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에도 적나라하게 아버지의 죽음이 묘사되어있다니.' 내가 알던 공주와 왕자님 같은 예쁜 이야기가 아니라 당황스러웠다. 강의가 점차 흥미로워 갈 지점에 장례지도사는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끈 뒤 흰종이를 꺼냈다. 그녀는 “여러분 여기다 자신의 장례식을 그려주세요.”라고 눈 하나 깜박하지 않으며 말했다. 도화지는 각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테이블마다 24색크레파스가 놓이면서 나는 머리가 마비되었다. 오로지 '나의 죽음'만을 상상했던 나에게 '장례식'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화두였다. ‘나의 장례식이라, 어렵다.' 선 하나 그리는 것 조차 괴로워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들 단숨에 그려내는 분위기에 주늑이 들었다. ‘다들 쉽게 쉽게 그리시네...’



새하얀 도화지가 마치 나의 최후를 그려내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가까이에 드리워져있는 나의 죽음은 이미지화 시키면 더욱 실현이 빨라질까봐 되도록이면 피하는 걸 택했다. 내일이 됐든, 모래가 됐든 어째뜬 나는 죽을 것인데 내가 그린 그림이 훗날 내 장례식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더욱 더 신중을 가했다. ‘그래, 내 죽음 따위는 아무도 관심 없게 작품을 그린다고 생각해보자.’ 빨주노초파남보의 크레파스를 손에 쥐고, 다채로운 꽃들과 나무들을 꽉 채워 넣었다. '그래 만약 내 죽음이 당장 일어난 다면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죽었으면 해.' 선명한 색깔도 잠시, ‘나의 장례식’이라는 주제를 완성하려면 나의 죽은 몸을 어디엔가는 그려야 했다. 나는 차마 '내 죽음'을 그릴 수 없어 나무 아래에 관을 그려 넣었다. 보랏빛의 크레파스가 거칠게 내 임종을 찍었다.


그림을 발표하는 시간이 되자, 나는 말을 더듬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말로서 풀어내려니 힘들었다. 내가 죽어서 슬퍼하는 엄마, 아빠의 얼굴이 그려졌다. 나는 내 장례식에 사람들이 많이 울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누구나 와서 즐길 수 있는, 장례식같지 않은 장레식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사람들은 내 화려한 그림에 탄성을 자아냈다. 사람들이 와 하는 것처럼 환성을 자아내는 장례식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외롭지 않고,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는 내 장례식 풍경을 상상했다.


다음 활동은 이미 떠나보낸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나는 장례지도사의 설명을 듣지 않아 이미 죽어버린 혹은 죽음을 직면한 나에게 글을 써버렸다. 나중에 모든 사람 앞에서 쓴 편지를 읽는다고 하셨을 땐 부끄럼과 창피함이 몰려왔다. 아이러니하게 모두가 울고 불고 난리가 난 상황에도 난 눈물 한방울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무덤덤해졌다. 하나같이 나보다 먼저 죽은 친구에게, 엄마에게를 들을 때마다 알 수 없는 거북함이 밀려왔다. '나는 왜 하필 주어를 나로 잡아가지고. 나도 할머니를 쓸 걸 그랬나.' 후회도 들었다. 나와 강의를 들은 사람 전부 가족과 친구의 죽음을 잊기 위해서 왔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 비참하게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가장 어린 내가 가장 먼저 내 죽음을 위했다니 조금은 슬픈걸?'



내가 쓴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약간의 각색을 거침)

조금 그렇다. 너 설마 책 10권은 내고 죽는 거지?
뭐라고?
야, 너 좀 열심히 살았다?
네 죽음이 절대 너 탓 아니니까 울지 말고 인마.
더 이상 뭐라 할 말 없고,
고생했다 임마.



울음 바다로 마무리 될 것 같던 강의는 장례지도사님이 가져온 카네이션 다발에 웃음을 되찾았다. 살짝 우유 핑크가 도는 꽃잎과 이슬이 맺혀있는 싱싱함은 마치 우리에게 '지금은 다들 살아있잖아요.'하며 희망을 속삭여주는 것 같았다. 타오르는 것 같은 생명력을 안아 들은 나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오늘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벅차올랐다.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모든 걸 할 수 있어.' 미소를 지으며 꽃을 들어 올렸다.




우리는 모두 태어난 순간부터 나이를 먹는다는 삶의 비극을 피할 길이 없다. 아주 조금 나이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뇌를 둔화시키고 육체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치료를 받으며 점점 저물어 가는 삶의 마지막 나날들을 모두 써 버리는 것이다.

죽음, 좀 더 정확히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주제일 수 도 있다. 의사가 생의 종말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조망하는 책을 썼다고 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성공적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죽음에 이르는 경험을 정직하게 살펴보기를 꺼려하는 경향 때문에 환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더 많아졌고, 환자들은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위로와 안식을 거부당해 왔다.

나는 지금까지 무슨 일이 벌어져 왔는지를 이해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 책을 썼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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