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부터 단짝이었던 친구에게서 자그마치 5년 만에 연락이 닿았다. 집에만 틀어 박혀 멍 때리고 있던 나는 그 전화가 고마우면서도 의심쩍었다. ‘얘가 왜 나한테 문자를 보냈을까?’ 수지(가명)는 3월 중순인 내 생일을 앞두고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함께 보러 가자고 했다. 영화 예고편을 찾아보니 잔잔한 영상미가 전형적인 힐링 영화였다. ‘어벤저스’나 ‘아이언맨’ 같이 빵빵 터지는 액션물을 좋아했던 나는 상영 도중 졸 것을 염려했다. 애써 영화 보자고 한 수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까 나는 '정말 재밌겠다. 그럼 우리 언제 만날까?'라며 수지에게 답장을 보냈다.
와, 동갑 친구랑 놀아 본게 대체 몇 년 만이냐.
엄마의 자동차 뒷자석에 앉아 수지를 기다리던 나는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를 향해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고민했다. ‘안녕! 하면서 밝게 손을 흔들까, 아님 달려가서 포옹을 할까. 반갑다는 말을 하는 게 가장 좋겠지?’ 생각하며 이런 저런 제스처를 고민했다. 디지털 시계의 숫자가 1분을 더할 때마다 혹시 길은 엇갈리지 않았는지, 약속 시간을 잘못 전한 건지 조바심이 나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수지가 걸어올 도로를 살피던 나는 만날 시간이 지난 걸 알고 엄마에게 속사연을 늘어놓았다. "이러다가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자동차 시트에 이마를 맞대고 '수지에게 속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무렵, 엄마가 나를 불렀다.
"시우야, 저기 수지 왔다."
내 뇌는 라디오 멈춤 버튼을 누른 것처럼 일시 정지됐다. ‘무슨 인사가 가장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친근할지 정리하지 못했는데!’ 머릿속이 카세트 테이프 선 엉킨 것처럼 복잡해졌다. ‘어떻게 인사를 건네지?’ 나는 차 문을 열고 몸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뿔싸! 어젯밤 드림렌즈를 끼지 않았더니 저기 걸어오고 있는 사람이 내 친구인지 아니면 그저 지나가고 있는 행인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럴 때는 웃는 게 최선이지.’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한 채 어리바리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도 그는 수지였다.
수지를 차에 태우고 나는 내가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안면근육을 끈임없이 움직였다. 그녀가 무슨 말만 하면 크게 반응하고 웃기를 반복했다. 오히려 수지와 엄마는 스스럼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엄마가 먼저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라며 말을 꺼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같이 영어 학원을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우리가 떨어진 시간이 자그마치 5년이 지났다니. 베스트 프렌드라며 항상 같이 붙어다녔는데.'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는 걸 체감하자 그녀를 대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나는 짝사랑하는 선배를 마주친 듯 그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영화를 보기 1시간 전, 우리는 남은 시간 동안 코엑스를 둘러 보기로 결정했다. 빈티지샵에 들어가 캡 모자를 써보기도 했고, 이니스프리에서 화장품을 발라 보기도 했다. 운동장보다 넓은 코엑스를 한참 돌아다닌 나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미 지쳐버렸다. 종아리가 후들후들 떨렸고, 서 있기 조차 힘들었다. ‘그만 걸었으면 좋겠다.’ 나는 간신히 수지에게 달려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내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천천히 내 보폭에 맞추어 걷게 했다. 수지는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 날 알아챈 건지 발걸음 속도를 늦췄다. 여전히 내 걸음걸이보단 빨랐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를 배려해주었다.
영화가 끝나고 우리는 카페에 들어가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가 생각보다 재밌었어. 다음에 또 보자." "그래, 다음에는 네 생일에 하자." 우리는 언제 낯을 가렸냐는 듯 어젯밤에도 봐왔던 것처럼 합이 척척 맞았다. 자연스레 자신이 다니고 있는 학교 이야기가 나오고 수지는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 호감이 가는 상대가 있다고 얘기했다. 나는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며 그녀를 응원해주었다. 수지가 "너는 요즘 학교에서 어때?"라고 물어보자, 나는 거짓말로 꾸미는 것보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택했다. "나는 요즘 학교 안 다니고 집에서 지내고 있어." 1000년 묶은 체증이 확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속 시원하게 얘기하니 그 다음 말도 생각하기 전에 나왔다. "글 쓰고 있어. 책 출판하려고." 수지는 멋있다며 자신은 아직 하고 싶은 게 없다고 말했다.
내 위주로 이야기가 돌아가는 게 부담스러웠었다. 나를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학교 생활은 어때?"라는 말을 물어볼 때마다 어디까지 사실을 드러내야 되는지 몰랐다. 나한테 학교나 학원 진도는 먼 나라 이야기였기 때문에 친구를 만나서 대화 할 거리가 없었다. 학교를 다니지 않다고 말하면 '왜?'라는 물음이 따를까봐 무서웠다. 가뜩이나 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힘든 친구에게 내가 건강에 문제가 있다며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먼저 솔직히 이야기를 하자 모든 것이 풀렸다. 숨기는 것이 없으니 대화가 더 편해졌다. 그녀 덕분에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영화를 보자고 제안이 오지 않았다면, 올해도 나는 홀로 생일을 맞이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