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그 날은 유독 밤 바람이 차가웠던 이른 봄이었다. 텔레비전을 10시간 동안 계속보는 나에게 화가 난 아빠는 말도 없이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내가 왜 끄냐고 물어보려고 하자 아빠는 "너 이럴꺼면 학교 가지마!"라며 호통쳤다. 갑작스레 쏘아대는 말에 당황한 나는 아빠를 똑바로 처다보며 대답했다. "이미 안 가고 있거든? 잘됐네. 이제 계속 안 가도 되지?" 자신에게 대든 모습에 욱한 아빠는 "어디서 아빠가 말하는데 또박또박 말대꾸야?"하며 화냈다. '나는 말을 하면 안되는 거야?' 나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자식'으로만 대하는 아빠가 어이 없었다. 나는 그 길로 방에 들어가 문을 잠궜다.
몇 분 뒤, 방문 앞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기어이 방문을 따고 들어오더니 "어디 어른이 계시는데 소리내며 문을 닫아?"하며 내 발바닥을 쇠젓가락으로 때렸다. 열여덟대를 구타한 아빠는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로 나갔다. "병신." 밖으로 나가면서 아빠는 한 단어를 말했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아빠의 말은 선명하게 도망 노예 인장처럼 가슴 깊이 각인되었다.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뒷모습만 바라봤다. 아빠가 또 들어올까봐 무서웠던 나는 문을 닫지도 못한 채 입을 막고 울었다.
아빠의 욕설은 내가 반박할 수 없게 나에게 딱 들어맞는 단어였다. '나는 진짜로 병이 있는 몸인데.' 단어를 곱씹으면 곱씹을 수록 심장이 종이장마냥 구겨졌다. 흔들리는 눈동자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가슴을 부여잡고 주먹으로 한 번 내리치다가 한 번 더 치며 눈물을 흘렸다. 소리를 내면 아빠가 다시 들어올 것 같아 나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런 수모를 당하며, 살고 싶지 않던 나는 장롱에 머리를 박았다. 두개골이 아파왔지만 아빠가 발설한 욕의 고통보다는 덜했다. 몸과 마음 둘 다 고통스러웠던 나는 그 자리에 주저 앉으며 입을 크게 벌려 소리를 지르며 절규했다.
이대로 집에 있으면 심장이 터져버릴것만 같아 나는 잠옷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신발을 신는 동안 엄마가 나가지말라며 말렸지만 나는 이미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후드티에 붙어있는 모자를 뒤집어 쓰고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왔다. 밖으로 나와 올려다 본 하늘은 내 마음처럼 온통 까맸다. 급하게 나오느라 핸드폰도 지갑도 없었던 나는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무조건 직진했다. 막상 밖에 나오니 갈 데가 없었다. 아파트 단지안에 군데 군데 켜져있는 전등을 향해 나는 홀린 듯 발을 옮겼다. 사람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길가에 나오니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엄마 아빠에게 충격을 주고 싶었던 나는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엄마 아빠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서 나왔지만 정작 상처를 입은 건 나였다. 한참 걷다보니 아파트 뒷길에 다다랐다. 나는 먼지가 쌓인 긴 나무의자 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 봤다. 캄캄했던 하늘이 어느새 변해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 달이네." 풀문에 가까웠던 상현달은 아직 다 채워지지 않은 미완성의 상태였다. "완전한 보름달이 되려면 며칠 더 걸리겠네. 그렇지만 금세 그믐달로 바뀌겠지. 너는 좋겠다. 초승달이 되어도 곧 다시 보름달로 변할 수 있잖아."
달은 27~28일 주기로 매일마다 모습을 바꾼다. 하지만 지구에서만 그렇게 보일 뿐이지 달은 원래 보름달의 모양 그대로 존재한다. 태양과 지구, 달의 위치 관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일뿐, 달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내 삶도 가끔은 힘들고 때로는 행복하기도 하지만 그런 일들로 인해 나의 가치가 변하지는 않는다. 나는 나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건 나는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내 고통과 힘듬은 달의 크레이터처럼 무늬를 만들것이고, 바람과 물에 깎여 쌓인 퇴적암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깎아봐라 더 멋진 조각상이 될 테니.'
얼마 후 엄마와 아빠가 공터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엄마는 이런 데에 있을 줄 몰랐다면서 나를 꽉 끌어 안았다. 엄마의 눈물 자국과 엉클어진 머리카락, 숨 가쁜 호흡이 뇌리에 박혔다. '엄마 아빠가 나를 찾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나를 부르며 찾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약간의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때 엄마 아빠는 나를 곧 전쟁에 나갈 사람처럼 꼭 안아주었다. 속상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엄마 아빠는 내가 가출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까봐 걱정한 것 같다. 아빠는 곧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며 사과를 했다. 하지만 나는 누가 어떤 말을 하던 간에 기울지 않는 달이라는 걸 알았다.
12/28
‘나’의 존재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충분히 빛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어떤 빛으로도 당신과 비교 되지 않음을
그 어던 빛보다 당신은 환하게 빛나고 있고 지금도 그러는 것을
그 무엇으로도 당신의 가치를 매길 수 없고 헤아릴 수 조차 없음을
높이 떠있는 별이 아닌
그 자체로 스스로 환하게 빛을 내고 빛을 주는 사람임을
따뜻한 빛을 내어주는 사람임을
때로는 어둠이 당신을 지배해도
어둠을 물리치지 않고도 따뜻하게 포용하고 빛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임을
나는 압니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