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 내향형 막내작가의 방송국 한 달 버티기
오늘의 이야기 : IIII 막내는 어떻게 한 달을 견뎠나, 그리고 첫 월급은 막내를 춤추게 했을까?
다들 첫 직장의 첫 한달, 첫 월급 기억나요? 기분이 어땠어요? 첫 월급으로 뭐 했나요?
어느새 6월 중순, 다큐팀 막내 작가가 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첫 한 달 동안 무수히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무엇보다 큰일은 사회에 던져진 초년생이 자신도 몰랐던 '사회성'이란 걸 발견하고 표출한 것 아닐까. 무엇이 사회성인가, 나는 지극히 내향적인 성격을 아주 조금씩 조종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나는 아무도 말을 안 시키면 종일 말을 안 할 수 있다. 속에 없는 말을 잘 못해서 궁금하지 않으면 굳이 말을 하지 않는다. 난 가만히 있었던 건데 아주 나중에 친해지고 첫인상에 대해서 들었을 때, 표정 또한 무섭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범접할 수 없다'나 뭐라나. (지금도 듣는다..)
하지만 사회는, 특히 방송국은 내가 내 성격만 가지고 살 순 없는 곳이었다. 나는 어느새, 서서히 회사 모드로 바뀌어갔다. 끊임없이 인사를 하고 끊임없이 말을 해야 했다.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꼭 인사하라고 해서 꼬박꼬박 인사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늘 뭔가를 찾고, 보고하고, 전화하고, 찾고, 전달하고, 확인하고, 피디님, 작가님 사이를 오가며 '말'하는 게 막내의 일이다. 그 무한 반복 속에서 낯가림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인가. 낯을 가리고 있다가는 일을 할 수 없으니 회사에선 또 다른 나로 지냈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었던 환경이었고 안 맞으면 그만두면 되는데도 불구학 나는 악착같이 그 환경에 적응하려고 무진장 애썼구나 싶어서 피식피식 웃긴다. 좋아했네, 싶고.
여하튼 그렇게 말을 조금씩 하면서 (많이 해봤자 사담보단 필요한 말만 했지만) 내 나름대로 환경이 편해지기도 편해졌던 모양이다. 얼마나 편해졌냐면, 신입의 긴장 따윈 없어지고 더위에 노곤노곤해서 노트북 앞에서 꾸벅꾸벅 졸았던 거다. 그러다가 뭐 하냐는 막내 PD님의 말에 놀라서 정신을 차리긴커녕, 멍-하니 보다가.. 아이스크림 사준다는 막내 PD님 말에 벌떡 일어나서 룰루랄라 나갔었다. 그렇게 한 번씩 나가서 놀고, 커피 마시고, 작가님들과 점심부터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는 낙에 회사에 적응해 나갔다. 선배들은 날 혼자두지 않았다. 늘 어느 술자리든, 밥자리든 데리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봐도 심하게 즐거웠다. 나 노는 거 좋아했네.
하지만 놀 수만 없는 게 또 방송국이지. 다큐팀 막내는 무엇을 하는가. 비단 다큐팀 막내뿐만이 아니라 방송에 입문한 막내작가의 경우는 하는 일이 비슷비슷하다. 제일 중요한 일은 자료조사와 정리 & 섭외 두 번째 중요한 일은 문서 정리다.
자료조사, 그때 자료조사 어떻게 했을까? 떠올리다가 새삼 놀랐다. 바야흐로 2009년, AI가 없던 시대다. AI가 뭔가, 이제 막 스마트폰이 나왔을 때다. 2009년, 태초의 삼성 갤럭시를 예약하고 구매했던 유저 중 하나가 나다. (애플과 삼성 중에 고민하다가 갤럭시를 썼는데 그 이후 17년을 갤럭시만 썼다는.... 딴 얘기) 여하튼 그런 시대에 자료를 찾는다는 것은 책상에 앉아서 노트북과 종일 씨름한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OOO의 보도'라고 해놓고 내용은 없는 자료는 어디서 찾을까? 도서관을 가거나 방송국 자료실로 가서 뒤진다. 지난 신문들을 쫙 펼쳐놓고 그 날짜의 보도를 찾는 것이다. 아직도 기억난다. 커다란 신문을 연도별로 묶어 놓은 무거운 파일을 꺼내서 넓은 책상에 턱 펼쳐놓고 한자를 독해해 가면서 자료를 찾았다. 재밌는 건 그렇게 찾은 건 잊히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면 나 개인이 하나의 챗GPT가 되는 것이다. 내 머리, 내 노트북에 자료를 계속 업데이트하는 것이다. (그렇게 업데이트된 자료들 아직도 잘 쓰고 있다)
그렇게 자료를 찾으면 다음 할 일은 확인 과정을 거치고, 최종적으로 자료를 정리한다. 직장으로 치면 보고서 만드는 것과 비슷할까? 선배 작가님들이 수많은 정보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게 정리하는 것 까지가 막내의 업무다. 그런데 그 '정리'라는 것이 매뉴얼이 없다. 스스로 폼과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보기 좋게' 정리해야 한다. (폼은 대부분 프로그램에선 전해지는 게 있다. 문제는 특집이나 기회 프로그램은 정말 처음부터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부딪히는 문제! '보기 좋게'의 기준은 내가 아니다, 작가님이 보기 좋게. 어렵다. 상대의 문서 미감을 햇병아리 막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냥 주야장천 썼다가 고치고 또 썼다가 고치는 게 일이다.
그렇게 자료조사를 하다 보면, 또 하나의 업무가 온다. '섭외'. 난 지금도 섭외를 무서워하는 후배 작가들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당시 전국의 자연을 담아야 하는 자연다큐를 만들어야 했던 만큼, 답사를 갈 곳에서 안내받을 분이나 혹은 전문가 등을 컨택하고 섭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그 전문가를 어떻게 섭외하느냐.. 전화번호 데이터가 있으면 쉽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 대부분은 단체를 통해서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생판 모르는 회사에 전하해서 그 분과 연락하고 싶다, 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따는 것이 첫 관문이다. 그렇게 전화번호를 얻으면 두 번째 과문이 열린다. 그 사람에게 전화해서 '저희 프로그램은 이러이러하고~~~~~~ 그래서 출연해 주세요'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전화라고는 친구와도 잘 안 하던 내가 일면식도 없는 남에게 전화해서 우리 프로그램의 취지를 설명하고 카메라 앞에서 설명해 주십사 설득해야 했다. 물론 중요한 인물들은 작가님들이 하고 나는 (지금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은 전문가들 섭외가 주어졌지만....
문제는 전화번호 누르는 것부터 '공포'였다. 전화기를 붙들고...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던 어린 나 자신. 솔직히 '받지 마라 받지 마라' 주문을 외운 적도 많았다. 그러다가 전화를 받으시면 어떻게 했을까? 달달달 떨면서 어찌어찌 말을 했는데 문제는.. 막내작가가 가장 하기 쉬운 실수가 뭘까? 이 통화 상황을 어떻게든 빨리 끊고 싶은 나머지 필요한 이야기를 못 받아낸다는 것이다. 나는 작가님이 시킨 질문의 반의 반도 못했고, 그렇게 또 전화하고 또 전화하고 또 전화했다. 그때의 나를 견뎌주신 전화기 너머 어르신, 그리고 작가님들께 지금에서야 무한히 감사하다. 내가 빠뜨린 게 있어도 작가님들은 화 한번 안 내셨다. 기다려주셨고, 알려주셨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는 한가지 스킬을 마련한다. '나만의 프롬프터 만들기' 전화하기 전에 꼭! 반드시 메모장에 통화 시 해야 할 말을 모두 적었다. '안녕하세요 저는~'부터 '그럼 나중에 변동사항 있으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까'까지. 일종의 시나리를 적어서 그대로 읊었다. 그 방법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 그렇게 하고 나서 전화하는 게 10%는 덜 무서워졌으니까. (전화가 무서운 분께 강력 추천)
돈 이야기를 한다고 해놓고 이 작가는 대체 월급 이야기 언제 할 거냐, 싶으시겠다. 이제 해보겠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달의 시간을 보낸 뒤, 드디어 첫 페이를 받았다.
내 통장에 찍힌 선명한 여섯 개의 숫자. 6XX, XXX
그렇다 막내작가의 첫 페이는 (원천징수 전) 70만 원이었다.
70만 원. 아르바이트 말고, 내가 '작가 일'을 해서 받은 첫 돈이었다. 감개무량... 했나? 아니, 솔직히 아주 솔직히 벅차게 기쁘진 페이. 그런 기분은 사실 나중에 찾아왔던 것 같고.. 그때 기분은 반반이었다. 내가 작가일을 배우면서 돈을 받네 좋아! + 한 달 열심히 일하면 막내작가는 이 금액을 받는구나.
(10년도 훨씬 전의 일이고, 현재 방송작가의 막내작가 페이는 사회 초년생 기준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럼 70만 원으로 한 달을 살 수 있을까? 어떤가, 살 수 있을까? 절대 못 살 것 같지만 사람은 뭐다? 적응의 동물! 살면 살아진다. 그것도 즐겁게. 70만 원이 돈이 생긴 나는 함께 일하던 친구와 함께 우리만의 파티를 하기로 했다. 우리가 간 곳은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 당시 부산에서 베니건스, 프라이데이와 함께 패밀리 레스토랑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아웃백이 우리의 탕진(?) 장소였다. 우리는 투움바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시키고 부쉬 브레드를 치즈에 찍어 먹으며 깔깔 신나게 즐겼다. (이후 페이 받고 아웃백 가기는 루틴이 되었다) 그 돈으로 쇼핑도 했고, 차비도 썼고 핸드폰 비용을 내면서 모자라지 않게 살았다. 물론 그때 물가가 지금과 같지 않았으니 가능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또 생각해 보면 턱없이 작은 돈이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일을 하고 돈이 생기고, 먹고 싶은 걸 먹고 하고 싶은 걸 하고 소소하게 적금을 들면서 지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은데 팔 할은 PD님과 작가님 덕분이었다. 그들 앞에서 내 지갑은 열릴 틈이 없었다. 늘 나에게 맛있는 걸 사주고 커피를 사주고, 회식을 하면 차비를 쥐어주던 분들. 회사에 나가서 내 돈을 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도 어지간히 눈치가 없었다. 돈 내지 마란다고 또 뒤에 서서 너무 안 냈던 거다. 그러던 어느 날, 한 PD님이 내게 말한다. "밥 한번 사야 하지 않나?"라고. 그 장소도 기억난다. 회사 근처 커피빈 2층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불쑥 농담처럼 이야기하셨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솔직히 그들이 나에게 뭘 사줄 이유는 없었다. 내 페이가 작은 건 그들의 탓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들은 막내를 꼭꼭 챙겼다. 커피를 산다고 해도 손사래 치며 막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도 많지 않은 월급을 받았을 텐데, 그거 절대 쉽지 않다. 사람이 도리가 있지 첫 페이 받으면 밥을 샀어야 했다. 이후에 난 선배들에게 중식을 샀다. 다들 엄청 즐겁게 드셨다. 월급을 받고 남에게 돈을 써서 행복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런 기억들. 그렇게 지낸 하루 이틀, 한 달이 지금까지 내가 방송작가를 하고 있는 이유가 되었다.
나는 운이 좋았다. 어린 사회 초년생의 처지를 이해해 주고 품고 가려고 한 좋은 작가선배들과 좋은 PD 님들과 일을 했다. 스스로 일은 한없이 벅찼지만 그래서 한계에 부딪혀서 그만둘까 생각도 많이 했지만 그럴 때마다 붙잡힌 건 선배들의 정이 컸다. 말수도 없고, 조용하고 무뚝뚝한 막내를 견뎌줬다. 조는 막내를 탓하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못해도 화내지 않고 또 해보라고 해주고, 어쩔 땐 나중에 해도 된다고 2시부터 회사를 나가서 맛있는 걸 먹으러 가기도 하고, 작은 일도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그랬다. 그 속에서 묘하게 뭔가 자꾸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들은 날 키우려 한 게 아니었겠지만, 온 팀원이 막내 한 명을 작가로 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며들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었던 다큐멘터리였는데 조금씩 그 형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방송의 처음은 영상이 아니다. 기획서로 시작된다. 기획서가 만들어진 다음, 구성안이 만들어지면 비로소 카메라가 등장한다. 활자로 된 내용을 영상으로 구현해 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그림'으로 어떤 '말'로 '메시지'를 담을 것인가? 처음에 기획서를 보면 이걸 어떻게 방송으로 만든다는 거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시키는 대로 자료를 찾고, 섭외를 하고, 내가 찾은 걸 토대로 촬영을 하고 그 촬영본이 쌓여가면서 궁금해졌다. 이것의 완성본은 어떨까? 그러게 또 붙잡혔던 것이다. 그렇게 방면 들었던 한 막내작가는 어느새 진짜 글 쓰는 '방송작가'를 꿈꾸게 되었던 것이다.
(글이.. 왤케 길어졌을까요)

다음 이야기 : 다큐 팀의 화려한 피날레 & 막내 작가가 '피'를 만든 사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