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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음 Mar 26. 2023

마음의 밑바닥을 보는 일

어떤 여름을 기억한다. 타인의 온기가 짐이 되는 계절. 축축한 습기와 화난 사람들의 목소리 이외엔 그 무엇도 남지 않은 계절. 그때 나는 밀려드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에어컨이 고장 난 사람들의 전화를 받아야 했고, 그리고 적어도 3주 안엔 당신의 에어컨을 고칠 수 없다고 말해야 했다.


망가진 시스템, 화가 난 사람들. 그 한가운데 전화선을 두고 내가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이었다.


영화 '다음 소희'에도 그런 여름이 나온다. 짜증과 습기만이 남은 계절. 그 계절의 찌꺼기를 오롯이 흡수해야 한 사람들. 화가 난 사람들, 고장 난 시스템. 그 가운데 전화선을 두고 열아홉의 아이가 있다.


아이가 실습생으로 첫발을 내디딘 곳은 콜센터 해지방어팀이었다. 정당한 페널티를 지불하고서라도 서비스 해지를 하겠다는 고객의 해지를 방어해야 하는 일. 몇 번의 전화를 뱅뱅이 돌면서도 해지를 할 수 없는 고객은 화가 잔뜩 나고, 그 방어막으로 소희와 같은 상담원들이 놓인다.


서비스 해지를 막아야 실적이 오르고, 그래야 인센티브를 받는다. 인센티브는 대가에 그치지 않는다. 경쟁의 실적은 모두에게 공개되고 그것은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앞선 사람은 앞선 사람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고, 뒤처진 사람은 수치심을 느낀다. 그 속에서 승자만이 옳다는 인식이 규범화된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소희가 날카롭게 변하던 순간이 있었다. 팀장이 죽고 난 뒤였다. 팀장은 유서에 노동 착취와 소비자 기만 등을 고발하지만, 이는 묻혀버린다.


"원래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모든 것은 팀장 개인의 문제로 묻혀버리고, 회사는 이를 위해 팀장에 대한 허위 소문을 만든다. 팀장의 가족은 그 전쟁에서 물러나기를 택한다. 사람들은 입을 닫았고, 소희도, 함께 일을 했던 사람들도 힘이 없었다. 밑바닥을 본 순간이었을 것이다.


"살면서 두 번 다시 그런 고통을 받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은 바로 배신감이었어요.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 마음의 밑바닥을 보는 것이었어요" 정혜윤 <그의 슬픔과 기쁨>


그때부터 소희는 마라톤을 하듯 질주한다. 하지만 약속한 인센티브는 돌아오지 않는다. 소희가 죽음을 결심한 순간이었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그것은 그곳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실적표는 어디에나 존재했다. 학교는 아이들을 취업시켜야 교육부로부터 인센티브를 받고, 교육청은 교육청과의 경쟁을 위해 아이들을 취업시켜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일터에서 학교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 그곳이 어떤 일터든. 돌아온다는 것은 낙인이 된다.


"소희가 무슨 일 하는지 알고 계셨나요" 경찰의 질문에 선생님의 답은 비껴간다. 그는 몰랐다. 몰라야 했고, 모르고 싶었을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소희가 춤을 추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소희는 이어폰을 낀 채 홀로 거울을 보며 춤을 추는데 소희가 듣는 음악이 내겐 들리지 않는다. 오직 춤을 추는 소희의 움직임과 숨소리만이 닿을 뿐이다. 그런 첫 장면이 꽤 오랜 시간 이어진다. 존재하는데,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 그녀에게 들리는 소리가 우리에겐 들리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신호였다.


"회피와 침묵, 비는 계속 내리는데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서운 일이 있을까"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영화 <다음 소희> 메인 예고편


잠이 오지 않는 여름밤이면, 그해의 여름을 생각난다. 잊을 만하면 잊어야 할 것들이 생기지만, 어떤 장면들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상하게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렇게 3주나 미뤄지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 우리가 고깃집을 하는데 이 더위에 에어컨이 고장 나면 손님을 못 받아요".. "그런데 아가씨 목소리가 안 좋은데 괜찮아요?"


당신도 살아야 하는데, 나를 걱정하던 목소리. 내게 살라고 말하던 목소리. 어떤 우연은 삶을 살게 하고, 어떤 우연은 삶을 무너지게 한다. 나의 삶은 매 순간 얽힌 우연들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당신의 우연한 조각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을 지나게 해 줬다. 다시, 여름을 살게 해 줬다.


그런 조각들이 모여 계절이 지나간다고,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게 우리가 살게 했으면 한다. 소희가 이 계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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