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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생각하는 뮌헨의 한낮

dolce far niente

by mig

지금 뮌헨은 한낮이다. 구름이 한두어 점 지나가며 해를 가려주면 잠시 그늘이 지나 싶지만 이내 강렬한 광선이 내 피부 위로 쏟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빛을 보고 왜 물처럼 쏟아진다고 하는지 알겠네. 그리고 지금 내 머릿속은 맥락 없게도 제주에 있다.


제주도에 많이 가보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이미 본 책 다시 안 보고, 이미 본 영화 다시 안 보는 내 기준에서는 이렇게 여러 번 다녀온 곳도 없다. 다만 갈 때마다 친구, 또는 친구의 친구가 있는 곳에 머무느라 제주도 구석구석을 둘러보지는 못했다.


한창 30대의 이른 '제2막 인생'이 화두인 적이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헬조선', '퇴사'라는 단어들과 함께 이슈가 되었던 것 같다. 일부 30대들이 대학 졸업과 취업, (그리고/또는 결혼) 후 '그렇게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가 아닌 '그 후 그들은 퇴사를 하고..!'를 선택하는 현상이었다. 당시 20대에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는 양양으로, 속초로, 제주로, 또는 외국으로 떠나는 주변 언니 오빠들을 보면서 '그런 트렌드가 있나 보다. 뭐 덕분에 여기저기 놀러 갈 곳 많아졌네' 정도로만 생각했다.


S언니 역시 그중 하나다.

하필 친구들과 자체 토토가를 연다고 무리한 탓에 며칠 동안 목소리가 나오지 않던 때 처음 언니를 만났다. 인간의 음성이라기보다는 호흡에 가까운 희미한 목소리로 손짓 발짓을 더해가며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된 S언니 부부의 퇴사 후 제주 정착이라는 n개년 계획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언니네 집 한쪽 벽에 전지 몇 장을 이어 붙인 프로젝트 계획 타임라인이 생생하다.


S언니네 제주도 집은 곧 나의 안식처가 되었다. 금요일 퇴근하자마자 김포공항으로 직행해 집이 완공되기 전 임시로 지내던 카라반으로 향했다. 집이 완공된 후에는 매번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그들의 게스트하우스로 날았다. 주기적으로 보던 얼굴들이 그리워서, 제주에서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 핑계는 매번 바뀌었지만 한동안 그렇게 금요일에는 제주로 퇴근을 했다.


캠핑카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청양고추 가득 넣은 번데기탕에 당일 출고된 제주 분홍이 막걸리를 수도 없이 비운다. 목수 부부의 숲 속 오두막집에서 열린 음악 공연에 간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에는 바닷가를 보며 커피를 내린다. 부부의 텃밭 일을 돕고 그곳에서 따온 상추를 얹어 김치비빔국수를 먹는다. 지인의 지인을 동원해 기어이 열 명이 넘는 큰 모임을 만들어 신나게 밤새 먹고 마신다. 잠시도 가만히 두지 않고 계속해서 전을 부쳐 주고, 찌개를 끓여주는 언니가 있는 곳에서 나는 열심히 받아먹는 것으로 내 역할을 다한다. 한라산 등반을 할 때도, 비자림에서 산림욕을 할 때도, 나의 제주 베이스캠프가 있어 든든했다. 먹고 마시는 것이라면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기에, 연태 여행에서 가져온 고량주도, 친구가 포르투갈 여행에서 가져온 포트와인도 모두 제주로 가장 먼저 들고 갔다.


시간이 흘러 내가 퇴사를 고민하게 되었을 때 역시 나는 제주로 향했다. 당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던 친구와 단둘이 제주로 갔고, 제주의 자연보다는 우리 자신의 내면 여행에 집중한 시간이었다. 유자맛 맥주를 마시며 게스트하우스 주방 앞에서 "1년 뒤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나의 생각이라는 자는 산만하기 이를 데 없기에, 1년 뒤의 내 모습뿐 아니라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에 대한 상상의 나래 역시 마음껏 펼쳤다. 보통 과거와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지, 미래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 나이기에 유난히 이날, 이 순간의 기억은 굉장히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한국에, 제주도에 가지 않은 햇수가 점점 늘어간다. 그래도 여전히 제주도에는 내가 가장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문 앞에 나타나도 김치찌개에 술 한 내어줄 것 같은 S언니가 제주에 있다. 그리고 오늘은 언니의 생일이다.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언니와 보낸 제주에서의 시간이 떠올라 괜히 더욱 애틋해졌다. 지금 여기는 아직도 눈이 부시고 햇살이 따가운 한낮인데. 매미도 울지 않는 뮌헨의 한여름, 내 머릿속에서는 맥락 없게도 제주 바다의 파도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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