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Himbeere
자주 놀러 가는 친구 부부네 집이 있다. 그 집 아기는 이제 두 살이 되어간다. 4개월 정도 되었을 때 회사 샘플로 받은 옷을 주러 가서부터 주기적으로 만나 놀았으니 자라는 모습을 꾸준히 지켜본 첫 남의 아이다. 예전에는 꼬물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바라보는 것 시간이 대부분이었는데, 돌을 넘어가면서는 정말로 ‘같이 논다’.
이 친구들은 한국-독일 부부이기 때문에 나의 역할은 아무래도 ‘한국어로’ 열심히 놀아주는 것. 아이는 물론 한국어도 독일어도 알아듣고 반응을 한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국어 조금, 독일어 조금, 옹알이 아주 많이. 아빠가 독일 사람이지만 그의 한국어 실력이 수준급인 덕분에 그는 한국어와 독일어를 함께 쓴다. 아이와 한국어 책을 읽다 보니 실력이 더 늘고 있다고.
아이와 다 함께 케이크를 먹을 때였다. 점심과 저녁 사이, Kaffee und Kuchen (커피와 케이크)을 즐기는 시간은 영국인들의 티타임만큼이나 독일인들이 즐기는 시간. 라즈베리 초코 케이크와 딸기 바닐라 케이크를 식탁 가운데 두고는 어른 넷이서 아이 하나에게 이 케이크를 주제로 끝도 없이 말을 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물론, 여러 단어를 말하도록 시켜보는 것.
“딸.기.케.이.크! 해보자, 딸. 기!”
“ㄸㅑㅉㅣ!”
아이는 뭐 이런 비슷한 소리로 “딸기”라는 단어를 성공적으로 따라 했다. “케이크”도 여러 번 시도했는데 “ㅋ” 발음이 어려운지 옹알이 급으로 따라 했다. 그다음은 “Schoko-Himbeer-Kuchen”. 라즈베리 초콜렛 케이크이다.
친구: Himbeer 한국어로 뭐였지?
나: 라즈베리!
친구 남편: 산딸기!
마치 정답을 외쳐야 하는 퀴즈 프로그램처럼 나와 친구 남편이 동시에 다른 단어를 외쳤다. 그리고 말을 뱉음과 동시에, 또는 그의 대답을 들은 동시에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아, 산딸기라는 예쁜 우리말 단어가 있었지.
독일어 학원을 다니던 때, 독일어 표현이 있는 단어의 경우는 그쪽이 더 수준 있는 어휘로 여겨진다는 것을 배웠다. 실생활에서 영어 표현이 더 널리 쓰이는 것과 별개로 그에 대응하는 독일어 단어를 쓰는 것이 교양 있고, 소위 배운 사람들의 표현이라는 것이었다.
이후 독일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그것을 실제로 느꼈다. 친한 동료와 편하게 이야기를 할 때는 영어 표현을 많이 섞어 쓰기도 하지만, 공식적인 담화나 전사 프레젠테이션 등에서는 독일어 단어를 사용한다. 유난히 영어를 자주 섞어 쓰던 한국에서의 업무 환경과 정반대의 인식이라 더욱 놀랐다. 영어가 널리 쓰이는 세계 공용어라고는
하지만, 같은 뜻의 우리말 표현이 있다면 그것을 더 선호하는 분위기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격하게 따지자면야 독일에서 우리가 접하는 산딸기는 한국에서 나는 산딸기와는 친척 관계라고 한다. 그래도 엄연히 한국어 표현이 있는 단어이니,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라즈베리보다는 산딸기를 먼저 알려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