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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뇽 Feb 28. 2021

생일선물

30번의 생일이 지나갔다

생일은 타이밍이라는 걸 유치원 때부터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2월 21일에 태어난 나는, 내 생일의 타이밍은 항상 별로라고 생각했다. 졸업 후 그리고 입학 전, 2주가 채 안 되는 시간의 한가운데서 하필 응애를 외치다니. 성격이 좀 급하거나 아님 여유를 좀 갖지 그랬어, 한 번은 거울을 보며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졸업이나 입학은 길면 6년, 빨라도 3년 주기로 왔으니 그저 재학하고 있는 시기엔 괜찮지 않았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재학 때도 여전히 타이밍은 좋지 않았다. 겨울방학 중에서도 보충수업조차 쉬는 겨울방학. 정말 애를 써야 생일이라는 걸 티 낼 수 있는 그런.


내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겨울방학 전 비슷한 시기에 있는 친구들과 생일을 몰아서 축하하거나 아님 으레 그렇고 그런 날로 만들어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거나.


열아홉 서울에 올라왔을 때부턴 엄마 아빠가 없는 공간에서 생일이 괜한 날짜 같이 부담스러웠고, 부담스럽다 보니 그다지 축하받거나 축하하고 싶지도 않아 자연스럽게 넘기고 싶어 졌다. 사는 게 힘든데, 태어나는 걸 축하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분갈이 없이 그냥 자갈 위에 던져진 화초처럼, 서울에 뿌리를 내리려 애쓰던 시절이었다.


이십 대가 절반 정도 지났을 때, 나는 서울에 사는 게 조금 덜 벅차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때부터 내 발 밑에 제대로 된 뿌리가 자라나고 있었던 것 같다. 여전히 밑 빠진 독이긴 했는데, 바닥을 조금 다져서 빠져도 조금 덜 빠졌고, 점점 더 빠지는 양은 줄어간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때쯤, 나는 태어나 가장 큰 생일 축하를 받았다. 빵빵한 풍선과 하얀 케이크, 제 날 맞이하는 오로지 나를 위한 케이크. 그리고 사람들이 건네는 잘 포장된 선물과 편지들. 생일에 흥미나 의미를 두는 걸 잊어버린 내게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처럼 생일 축하노래가 들려왔다. 촛불 사이로 둥둥 떠다니는 사랑들의 얼굴들. 그날을 떠올리면 배 위에 전기담요를 올려놓은 것처럼 속이 뜨뜻해진다. 그때 이후로 매번 즐거운 생일을 보냈다.


퇴근 후 집 앞에 쌓인 택배 상자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네이버와 카카오의 성장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친 건 주가뿐만이 아니었다.





생일이 있던 주말, 늦잠을 자고 일어나 커피를 내렸다. 작년 지원이가 선물해준 커피 그라인더에 프릳츠 원두를 붓고, 잘게 갈리도록 다이얼을 돌렸다. 버튼을 누르자, 갈리는 소리와 함께 원두향이 집 안에 퍼졌다. 커피를 내리는 모든 과정 중 가장 향이 좋은 순간이다. 원두가 다 갈리자 스스로에게 선물한 드리퍼에 탈탈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물은 드리퍼를 지나 황금색의 줄기를 거쳐 연한 갈색으로 물들었다. 찬장에서 커피잔을 꺼냈다.

하얀 도화지 위에 누군가 파란 꽃을 그려놓은 듯한 커피잔이다. 얼마 전 수지가 준 생일선물이었다. 작년, 박스에 편지를 써서 보낸 수지가 생각나 꺼내면서 이미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띵- 김이 솔솔 올라오는 커피를 보고 있자, 거실에 놓인 토스터기에서 디저트를 꺼내가라는 알림음이 울렸다. 토스터기를 열자 와플 향이 거실에 가득 찼다. 접시 위에 와플이 올려 바닐라 시럽을 두 번 돌리고 그 위에 얼린 블루베리를 올렸다.


매번 우리 집에서 음식을 맛있게 먹던 나래는 이 접시를 주면서 우리 집에 잘 어울릴 거라고 했다. 그녀 말이 맞았다. 그냥 잘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재경이 준 나이프, 희준이 준 포크와도 접시는 아주 잘 어울렸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알까. 그들의 일부가 주말 아침, 우리 집에서 만난다는 걸.



이 순간, 나는 이제껏 내 주변 사람들에게 받았던 생일 선물이 그저 어떤 한 물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들이 선물을 줄 때부터 이미 거기에 들은 고민과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아는 걸 넘어 깨닫는 것이다. 이들이 내게 준 건, 이렇게도 행복한 순간이라고. 고요한 아침의 커피 향과 블루베리 와플의 달콤함 같은 매 순간. 저 와인은 잠들기 전 혼자 홀짝이며 하루를 정리할 여유를 주겠지. 훈제 돼지고기를 만들 수 있는 오븐은 많은 사람들과 나눌 즐거움을 주겠지. 샤워 후 몸에 바를 바디크림은 오늘도 잘 살았다, 하며 스스로 도닥일 힘이 될 거야. 전동칫솔로 오늘도 고생한 나를 구석구석 씻어낼거야. 내 집을 둘러볼수록 나는 분에 넘칠 만큼 많은 행복들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번 생일은 서른 살이 되는, 30대의 첫 생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받은 가장 큰 생일선물은 바로 이 사람들이라는 걸 제대로 알게 된 그런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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