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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뇽 Nov 02. 2016

집사의 패배감

래핑폭스, 넌 내게 패배감을 줬어

래핑이는 누굴 닮았는 지 매일 사고를 친다. 지난 달, 세탁에 맡긴 이불만 5채가 넘는다. 부쩍 추워진 날씨 때문에 베란다로 내쫓을 수 없고, 철장에 가둬두면 자꾸 울어대 잠을 잘 수가 없어 풀어줬더니 이불에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팔 것도 없는데 파서 싸고, 덮을 것도 없는데 덮는 시늉을 한다. 큼큼한 냄새가 나거나, 슬슬 내 눈치를 보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이미 이불을 척척하게 적신 이후다. 예전 같으면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잡아 무릎을 꿇히고 잔소리를 퍼부었을텐데, 이제는 조용히이불을 돌돌 말아 왁스물에 담가놓는다. 무기력을 학습한 탓이다. 어제도 사고를 치더니 오늘도 쳤구나. 작년에도 싸질러놨더니, 올해도 싸질러놓는구나. 그러곤 뒷정리를 하는 것이다.



도도한 치즈태비, 폭스는 다를까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완전무결한 척 굴다가 폭스는 매일 출근 전이나 등교 전에 내게 깊은 빡침을 선사한다. 바로 꼭꼭 씹어놓은 이어폰이나, 잘근잘근 끊어놓은 충전기 같은 걸로. 이어폰을 간신히 끊어놓던 아이가, 이제 맥북 충전기쯤은 거뜬하게 물어뜯는다. 폭스의 잘자란 이빨을 보면 나는 웃는 지 우는 지알 수 없는 감정이 든다. 저번 달, 나는 두개의 이어폰과 하나의 헤드폰에 작별인사를 해야 했고, 또 새로운 이어폰을 사야만 했다.  사망 직전에서 구조된 아이폰 충전기에는 동그란 이빨자국이 나있어 매번 핸드폰을 충전할 때마다 내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안긴다. 이어폰은 책상 위에 올려놨는지, 충전기는 돌돌 말아 서랍장에 넣어놨는지, 제 때 잘 치우지 못하는 집사 탓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또 패배감을 학습했다.



 하지만 오늘부터 나는 달라졌다. 더이상 참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침에 눈을 떠 사료봉지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래핑이 앞에서, 아이라이너를 씹다가 자신의 이빨을 브라운으로 칠해놓은 폭스 앞에서, 다짐했다.


아니 사실은 애초에 참을 필요가 없다!


재워주고 먹여주고 씻겨주는 사람이 왜 참기까지 해야 하는가! 뉴스를 계속 틀어놨더니 어디서 배은망덕한 것들만 배워가지고, 고양이들이 하는 짓이 꼭 요새 돌아가는 수상한 세상 같달까.


당당히 화내자. 당연히 분노하고 반드시 책임을 묻자.


우리는 그럴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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