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어두운 얼굴의 새벽이 차창 너머로 배웅을 나왔다. 붕붕거리는 버스의 진동을 느끼며 곧장 잠에 빠졌다. 얼마나 곤히 잠든 건지, 버스가 휴게소에 멈춰 섰는지도 알지 못했다. 내가 눈을 뜬 건 출발 후 3시간 반이 지난 10시 45분쯤, 창을 시끄럽게 두드리는 햇빛 때문이었다.
일어나지 않으면 눈을 찔러버릴 듯한 기세로 쳐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간신히 잠에서 빠져나온 나는 뒤로 젖혔던 의자를 조금 세우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산기슭이었다.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옛날엔 특별한 걸 봐야 좋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뭐든 볼 수 있다는 게 특별한 거라는 생각을 한다.
어제까지 내가 마주했던 창가엔 건물과 사람과 차들이 있었다. 어떤 날에는 출근을 위해 올라탄 163번 버스에 사람이 너무 많아 창이 보이지 않거나, 창을 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가끔 퇴근길에서 성산대교 위 언뜻언뜻 한강을 볼 때마다 그것만으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내 눈 앞에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져 있다.
하얀 눈 사이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초록잎들과 투블럭으로 머리가 밀린 숲, 그 속에 드문드문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들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자리 잡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는 자연 앞에서 나는 괜히 웃음이 났다. 숨을 쉬고 있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한참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참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그때 갑자기 한 단어가 떠올랐다.
직관적으로 지금과 어떤 연관성도 갖지 못하는 '부레옥잠'이라는 단어였다.
부레옥잠
무의식 속에서 흘러 다니다가 길을 잃어버려 의식 속으로 떠밀려온 걸까. 내가 떠올려놓고 이유에 대해 한참을 고민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다. 초등학교 4학년 교실 창가에 놓여있던 그 부레옥잠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부레옥잠과 지금 나의 여행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아니, 있긴 한 걸까.
부레옥잠, 부레옥잠, 부레옥잠. 초록색. 식물. 물 위를 부유하는. 물 위를 부유하는 초록색 식물. 부유?
소리 내어 내가 아는 부레옥잠에 대해 중얼거리다 '부유'에 멈춰 섰다. 부유. 여전히 버스는 남해를 향해 발을 굴렸다. 그리고 나는 그 길 속에서 남해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연희동에서 오목교까지 40분. 따뜻한 물 위에서 부레옥잠은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개구리의 괴롭힘이나 수온의 변화 같은 건 남일이었다. 수조 안의 정수시설은 매시간 물을 걸렀고, 수조 옆 유리창은 바깥세상에서 찬바람은 걸러냈다. 그 안에 있으면 부레옥잠의 시간은 그냥 흘러갔다. 월화수목금토일. 월화수목금토일. 월화수목금토일.
어쩌다 부레옥잠이 수조를 탈출한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서울에서 남해까지 4시간 30분의 수로 위에 몸을 던진 걸까. 수로의 끝이 바다로 이어져있는지도 모르면서.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수로로 뛰어들어갔으니 찬 물 더운물 가릴 팔자가 아니다. 가끔은 몸에 닿는 오염된 물 때문에 수조 안을 그리워할 것이다. 싸울만한 청개구리보다 뱀도 잡아먹는다는 황소개구리를 만날 일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 좋은 수조를 버리고 수로에 뛰어든 것일까. 나는 잠시 글을 치던 손가락을 멈추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탑동 내릴 분 있읍니까 탑동
남해대교가 쓱 나타났다 사라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기사 아저씨의 목소리가 버스 안에 울려 퍼졌다. 경상도 사투리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아저씨는 탑동 다음엔 동도마마을, 동도마 마을 다음엔 알아들을 수 없는 어딘가를 불러댔다. 경매장 같이 사람들은 손을 들어 내릴 의사를 표현했는데, 서울에선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모든 사람이 한 곳에서 내려야 하는 곳 또한 수조였을까.
아저씨는 곧 종착지 남해터미널 도착을 알렸다.
3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