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작가 성장 다큐
INTERVIEWER: Can you recall an exact moment when you decided to become a writer?
HEMINGWAY: No, I always wanted to be a writer.
Ernest Hemingway, The Art of Fiction No. 21 – The Paris Review (Spring 1958, Issue 18)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파리 리뷰> 인터뷰 중
“작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이 정확히 언제인가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는 늘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는 글쓰기를 향한 그의 열망이 언제나 삶의 일부였고,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의 정체성이었으며, 본성 그 자체였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을까.
어렸을 때부터 되고 싶은 직업은 많았다. 방송국 PD, 기자, 아나운서, 카피라이터, 그리고 작가.
더 어렸을 때는 미스코리아, 피아니스트, 연예인을 꿈꿨던 적도 있지만, 내 길이 아니란 걸 일찍 깨달은 것이 다행이다.
희망 직업을 살펴보니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무언가 창작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30여 년 짧은 인생을 돌이켜보면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할 말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중학교 때는 흔히 말하는 ‘노는 애들’이 내 교복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야 너 발목양말 신지 마라, 이년 교복도 줄였네?”
당시 우리 학교에선 발목 위를 덮는 흰 양말에 펑퍼짐한 교복을 입어야 했다. 그래서 발목양말과 몸에 딱 맞게 교복을 줄여 입는 건 ‘노는 애들’만의 상징 같은 거였다. 나는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그 암묵적인 규정이 싫었다. 종아리의 알을 도드라지게 하고 가뜩이나 짧은 다리를 더 짧아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목양말과 줄인 교복을 입고 다닌 것이었다. 피차 같은 입장끼리 서로를 규제하는 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에 용기내어 할 말은 해야 했다.
“내 돈 가지고 내가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
그 친구는 그 뒤로도 몇 번 나에게 경고를 했지만 특별한 조치(?)를 취하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나쁜 애는 아니었던가, 그냥 나를 또라이라고 생각했거나, 아니 정말 어쩌면 나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거나.
지금 생각해 보면, 부당한 권력과 획일화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던 것은 나에게 뭔가 꿈틀거리는 작가의 기질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다.
고등학교 때도 소소한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선생님들 교무실을 왜 학생들이 청소를 하는지 이해를 못 했다.
심지어 분리수거도 제대로 해놓지 않은 선생님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종이에 “윗 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고 교무실 쓰레기통 앞에 붙여놓았다. 다행인 건 같이 청소하는 당번 친구가 선생님들이 보기 전에 그 종이를 떼버렸다. (그때만 해도 한 명이 잘못하면 다 같이 맞았기 때문에 친구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늘 할 말은 참지 못하고 살아왔던 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불의를 봐도 잘 참고, 하고 싶은 말도 꾹 누르게 되었다. 아마도 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의 삶을 살게 되면서였을 것이다.
나에게 돈을 주는 사람들, 혹은 나의 생존 여부를 결정짓는 윗 선배들이 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며 ‘같이 갈 사람인지, 버려도 되는 사람인지’ 평가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였다.
나는 꿈에 그리는 방송국에서 일하는 방송작가가 되었다. 대중매체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니, 표현이나 단어 하나하나까지도 조심스러웠다. 혹시라도 잘못된 정보나 오해가 될만한 빌미를 제공해선 안 됐다. 특히 내 개인적인 생각 같은 건 절대로 말해선 안 됐다. 조사한 자료대로, 약속한 의도대로, 객관적인 사실만을 글로 써내야 했다.
나는 항상 부당함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유를 향해 몸부림을 치던 아이였는데 그걸 못하니 생명력을 잃은 기분이었다. 한 번은 참다 참다 하늘 같은 선배 PD의 불합리한 지시에 총대를 메고 ‘할 말’을 했다. 값비싼 한우까지 얻어먹고 시키는 일을 거부한 후배 작가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 PD들 사이에서 ‘또라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거 같다. 제작비 카드로 생색을 내놓고는, 그 사실을 침묵해 준 후배의 배려는 안중에도 없이 말이다. 그렇게 방송국을 떠나 외주제작사에서 작가로 일했다. 거기에서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시키는 대로 글을 쓰고 돈을 받았다.
밤낮없이 일하고 남은 시간은 부족한 잠을 채우느라 바빴던 나는 언젠가 말을 잃었다. 당당하게 할 말은 했던 본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먹고살기 위해 입을 다물며 살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게 내가 꿈꿔왔던 작가의 모습일까?”
방송작가라는 일에 회의감이 들 무렵,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옛 동료가 작가님이라고 부르면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다. 현업에서 떠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작가냐고. 첫째 아이가 6살이 되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내 목소리로 세상에 던지고 싶었던 질문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작가지망생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누군가 시켜주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품은 지망생으로. 모두가 잠든 시간 홀로 깨어 노트북을 켠다. 글을 쓰는 내 모습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시간. 말하지 못했던 시간을 지나, 이제야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려한다.
*사진 출처 : 위키미디어 / N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