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적은 있지만, 포기하진 않았습니다
아이들 저녁을 해먹이고 거실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소파가 없는 우리 집에서 잠시 누워서 휴식을 취하려면 거실 책장 앞 빈백에 반쯤 기대어 누운 채로 있어야 한다. 내 할 일은 이제 다 했고, 남편이 와서 아이들을 씻기기만 하면 하루 일과는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다.
아이들도 여느 때처럼 이 방 저 방을 다니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이 베란다에서 뛰쳐나와 부엌까지 도망치더니 거실에 누워있는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내가 있던 거실은 하얀 연기로 가득 찼다.
다급하게 창문을 열고 연기의 근원을 찾아 이리저리 집을 뛰어다녔다. 원인은 베란다에서 안전핀이 뽑힌 채 스스로 분말을 분사하고 있던 소화기였다.
하얀 분말이 공기 중에 흩어지고, 바닥은 분홍빛 눈이라도 내린 듯 붉은 가루들로 뒤덮였다. 정신이 아득했다. 순식간에 베란다와 거실은 전쟁터가 되었고, 나는 속으로 외쳤다.
“망했다.”
휴식은커녕, 저녁 내내 닦고 환기시키느라 진이 빠졌다. 다시 집이 예전 사고가 일어나기 전 시점으로 모습을 갖추었다. “이건… 진짜 대박이야.”그 순간,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기지 못한 게 아쉬웠다. 콘텐츠로 만들었으면 진짜 말 그대로 내 계정이 '떡상’할 만큼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너무 경황이 없어서 나는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못하고 티도 안 나게 깨끗이 치운 것이다. 아쉬운 대로 스레드에 오늘의 일을 글로 남겼다.
제 아이들이
집에서 소화기를 터뜨렸습니다...
불은 나지 않았습니다..
괜찮습니다..
다만 오늘 저녁은
글을 쓸 기운이 없습니다.
내일 뵐게요.
그러자 많은 댓글이 달렸다. 위로를 건네는 사람들, 또는 재치 있는 답변으로 웃음 짓게 하는 사람들, 이런 낯선 이들의 공감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언제 힘들었다는 듯, 나는 이 사건을 금세 추억하고 사람들과 나누고 있었다.
그 시간들이 즐거웠다. 내 이야기를 글로 남긴다는 건, 단순히 기록이 아니라 사람들과 연결되는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글을 쓰는 일은 나 혼자만의 고독한 작업이기도 하지만, 글을 쓴 이후에는 누군가의 마음과 조용히 나누는 일이라는 걸.
그동안은 글을 쓰면서 많이 힘들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던 시간들이 있었다.
좋아요 0, 댓글 0. 그 숫자들은 한동안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써서 뭐 하나' 싶었다. 아무도 안 읽는 글을 혼자 열심히 쓰고 있는 내가 한심해 보였다. 꾸준하게 쓰면 그래도 내 글을 보는 사람들이 있겠지, 하지만 꾸준하지 못했다.
육아와 집안일, 개인적인 우울감이 겹쳐서 글을 쓸 힘조차 나지 않았던 날들도 있었다. 아이들을 재우면서 내가 먼저 잠들기 일쑤였다. 노트북을 열었다가 다시 덮고, '오늘은 쓸 말도 없는데 쉬자'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던 날들. 쓰고 싶지만 쓸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면서, 나는 점점 글쓰기로부터 멀어졌다.
한 달, 두 달, 석 달. 어느새 2년 동안 브런치에 접속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글을 굳이 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2년 사이엔 둘째가 태어났고, 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배웠다. 힘들었지만 의미 있는 시간들. 이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으면, 전부 흘러가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썼다.
조금씩. 천천히. 누가 읽을지 모르지만 일단 썼다.
다시 사람들 앞에 내 글을 내보이기까지는 수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이렇게 써서 누가 읽어줄까?"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조금씩 나의 생생한 스토리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 한 사람을 위해서 다음 글을 썼다. 그렇게 멈추었던 나의 글쓰기는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이런 시간들이 온다는 걸 지금은 안다. 삶에 지쳐 있을 때, 내 글을 읽고 위로받았다는 댓글이 달렸다. “잘 보고 있어요.” “재밌어요.””계속 써주세요.” 그 한 마디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위로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의 하루를 바꾸기도 한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내게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내가 겪은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공감이 되고, 내가 느낀 작은 감정들이 누군가에게는 위안이 된다는 것. 그게 나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브런치 독자 100명, 스레드 팔로워 2000여 명이 모였다. 누군가에게는 작게 보일지도 모른다. 요즘 인플루언서들은 몇만, 몇십만 팔로워를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는 이보다 큰 숫자가 없다.
그건 단순히 팔로워 수가 아니라 오랜 시간, 흔들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써온 시간의 무게다. 반응 없던 날들을 견뎌낸 시간, 쓸 수 없던 날들을 이겨낸 시간,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낸 시간들이 모여 만들어진 숫자다.
한 편의 글, 한 줄의 문장, 그 작은 파동들이 모여 만들어낸 사람들의 흔적이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적도 없고, 바이럴 된 적도 없다.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적도 없다. 그저 조금씩, 천천히, 꾸준히 썼을 뿐이다.
내 글에 공감해 주는 말들이 내가 다시 글을 쓰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확신이, 내 안의 불씨를 다시 살려준다. 혼자 쓰는 게 아니구나. 누군가 읽어주고 있구나.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다시 글을 쓸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안다.
쓰는 일은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다. 내가 쓴 문장은 독자의 마음에서 완성된다. 글은 결국, 사람들과 함께 만드는 공동작업이다.
내가 글을 쓰면 누군가 읽어준다. 누군가 공감해 준다. 그 공감이 다시 나에게 돌아와 또 다른 글을 쓰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조용히 연결된다.
누군가 내 이야기에 미소 짓고, 또 다른 누군가가 내 문장에서 위로를 받는다면, 그건 이미 작지만 분명한 기적이다.
나는 아주 더디게 자라는 사람이지만 멈추지 않는다. 그 느린 걸음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오늘 못 쓰면 내일 쓰면 되고, 이번 주에 못 쓰면 다음 주에 쓰면 된다.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쓴 글 한 줄이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그 하루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쓴다. 내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기적이 스치길 바라며. 그리고 그 기적이 다시 나에게 돌아와, 내일도 쓸 수 있는 힘이 되길 바라며.
글을 쓴다는 건 결국, 사람들과 만드는 작은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