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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뭉 Jul 04. 2021

#1 이 세상에 태어나 취업

1편 왜 태어났니? 돈 벌려고 태어났니?


난 태어나고 보니 우리 엄마, 아빠의 아들로 태어나 있었다 


나의 어머님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받고 있다는 피해의식과 남성 우월주의적 농촌사회에서의 억눌림, 깡패 같은 성향의 오빠들, 드센 기운의 여자로 태어나, 맘만 먹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내 뜻대로 이룰 수 있다는 욕심 많은 여자였고, 나의 아버지는 20살이 채 되기 전 아버지를 병환으로 잃고, 남편 잃은 슬픔으로 술에 취해 있는 할머니와 사고 치는 동생들 틈바구니에서 나름 한 가정의 아버지 역할을 하며 두 집 살림을 살아온 남자였다. 


욕심 많고, 사랑에 궁핍한 어머니는 그녀와 꾸린 가정보다 앞서 이미 한 가정의 아버지였던 그와 잘 되려야 잘 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사랑의 궁핍을 나에게 바라게 되었고, 본인 이상형처럼 키우고 싶어 하셨다

난 어머니의 아들이자 남사친이자 남편이기도 했으며, 때론 죽이고 싶도록 미운 남편을 대신한 화살 받이가 되기도 했다. 아마 요즘 시대 같았다면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할 정도로 그녀의 손에 자비는 없었다.

 

당시 어머니의 꿈은 나를 미국 유명 대학의 로스쿨에 입학시켜 판, 검사로 키우겠다는 것이었고, 그런 그녀의 꿈이 곧 나의 꿈이라고 믿었었다. 어찌 보면 세상에 악다구니 치는 그녀가 불쌍해 보였고, 자기가 꾸린 가정과 자기 아버지가 꾸린 가정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며 한 달에 한번 월급날 먹을까 말까 한 시장표 종이 봉지 치킨에 있는 달랑 두 조각 있는 닭다리까지 뺏어 먹는 아버지가 역겨워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보람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채워주기에는 한 없이 부족했었다. 


방구석에는 사흘이 멀다 하고 깨진 유리조각 파편과 부서진 나무 조각들이 널브러져서 있었고, 찢어진 내 발바닥과 바닥이 무서워서 바닥에 발을 딛지도 못 한 채 몸을 덜덜 떨면서 울고 있는 여동생을 보며 좌절하는 일이 일상이 되고, 연탄집게를 들고 쫓아오는 그녀에게서 여동생을 끌어안고 허벅지를 찔려 가며, 온몸으로 그 악다구니를 막아 가며 언제나 기도했다. 내게 힘을 달라고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기 위해선 폭력이 왜 나쁜 것이고, 지금 동생과 나의 상황을 도와줘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내 권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고, 인터넷이 없던 그 시절에는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정보를 모을 방법이 너무 부족해서 부모님이 없는 틈을 타 신문을 읽어 보기도 하고, 전화번호부라는 책을 보고, 변호사 사무실 등에 전화해서 물어가며 정보를 취합한 지 몇 달 후 동생과 둘이서 과감하게 천 원짜리 몇 장 손에 쥐고 탈출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나의 꿈은 대통령이 었다가, 어떤 때는 물리학자였다가 많이 갈팡질팡 했지만 궁극의 목적은 뭔가 멋있고, 지적인 지식을 풍기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더랬다. 그러나 내 현재의 삶은 항상 부조리하고, 억눌려 있었으며, 결국 난 법학을 배워서 경찰이 검찰, 판사, 변호사가 되어서 나와 동생 같은 가정폭력 피해자를 도와주고, 부조리하고 원칙에 어긋나든 나쁜 놈들 혼내주고 싶다는 마음에 법학의 길에 발을 딛게 되었다.  


물론 삶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가혹하리 만큼 운명은 내 계획을 철저히 무시하고 이뤄지며, 연속되는 삶의 고비에서 생기는 무수한 변고들은 날 다른 길로 이끌었고, 그래도 그 꿈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매달려 있던 나는 지방대 법학과를 졸업하여, 한 법무법인에 늦은 나이에 취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만 해도 법무법인에 직원들 월급은 100만 원이 조금 넘는 월급을 받고, 여직원들은 보통 비서라고 하여 변호사가 주는 서면에 증거를 붙여 서류를 만들거나, 법인 회계, 인사, 총무 일을 포함 한 내근 업무를  했으며,  남자 직원들은 영업하는 사무장 아니면 법원에 가서 기록 복사하고, 여직원들이 만들어 주는 서류를 법원, 검찰청 등에 접수하는 외근 업무가 전부였다.  


너무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시절 즈음해 "애드버킷"이라는 변호사 드라마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변호사 옆에서 함께 사건을 탐구하며, 사건 해결을 위해 일하는 사무장(당시에 그 역할을 "이영애"님이 배역으로 연기하신 것으로 기억한다)이 너무 멋있어 보였는데 현장에 와보니 웬걸 사무장들은 영맨이랑 다를 바 없는 영업사원들이었고, 온갖 거짓말을 포장해서 사건 수임하기 바쁘고, 경력 좀 되다는 고졸 여자 직원들은 대졸 남자 직원을 눈꼴셔했으며, 변호사는 겉으로는 근엄하고, 지식인 인척 하지만 그냥 한 낱 개인 사업자에 불과했다.  


남자 직원들은 단순히 간단한 외근 업무만 시키거나, 변호사들 대외용 운전기사로 쓸 요량으로 채용하기 때문에 고졸 학생들을 알바처럼 쓰다가 퇴사하기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았고,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경력이 쌓이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청년취업인턴제를 신청해서 매일 출근 도장을 찍고 한 동안 임금의 절반을 나라에서 타 먹었으니 대략 그 법무법인은 60만 원의 인건비를 주고 날 써먹은 셈이었다.  


이 시험 저 시험 전전하다 시간만 까먹고, 배운건 없고 기술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많지 않았다. 최대한 그 꿈의 끝자락이라도 붙잡아 그저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매달리는 만큼 난 더 열심히 발바닥이 뜨겁도록 땀 흘려 일을 했었다(실제 3달에 한 번씩 구두를 갈았고, 발바닥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져서 소독을 하며 회사를 다녔다).  


한 번은 한 여름에 동, 서, 남, 북 법원(서울에 있는 법원을 다 돌았던 것이다)을 다 돌고 의정부 법원에 들어가는 중에 땀에 젖은 바지가 그대로 찢어지면서 정말 민망했던 기억이 있다, 다행히 여름용 재킷을 입고 있어서 서둘러 허리춤에 두르고 급히 근처 세탁소를 찾아 사정사정해서 꿰맨 적이 있는데, 세탁소에서 바지 수선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고, 땀냄새나는 내 몸과 팬티가 다 보이는 바지 때문에 부끄러워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얼굴이 벌게지도록 뛰었던 건 평생 처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부동산 가압류를 접수하러 가는 길에 왜 부동산 소재지 관할에다 신청하지 않고 본안 재판부 관할지에 접수하냐고 반려하는 담당 실무관가 법원 실무제요를 싸들고 올라가 싸워서 접수시키고, 날 죽이고 유체동산 압류를 하라는 채무자에게 배우자 우선매수 청구권이 있으니 일단 절반만 내면 살 수 있다고 넌지시 알려주고 합의해 주며 아득 바득 일을 해나갔다. 


그렇게 3년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강제집행 사건 들 신청 사건들 업무들을 전담으로 할 수가 있었는데(이것도 통상 내가 법학과를 졸업해서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다른 남자 직원들은 기존 송무 업무에서 크게 벗어 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특히 명도나 철거, 동산 압류, 경매 등 집행과 관련된 업무를 전반적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한 번은 토지에 허가 없이 설치한 불법건축물을 명도 및 철거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상대방이 생전 처음 보는 기다란 드라이버를 들고 휘두르며 쫓아와 집행관과 함께 혼비백산한 적도 있었다. 난 집행관에게는 민사집행법상 법률로써 경찰 및 군대의 지원 요청이 가능하다고 명시되어 있으므로 당당하게 이를 요구했지만, 세상에 미친놈은 많았고, 경찰이 와서도 "어... 선생님 이러시면 안 되고요... 경찰은 민사 사건에 개입할 수가 없고요..." 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 잘못하면 내가 남 일 하다가 요단강을 건널 수 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 뒤로는 곤란한 사건은 고민하지 않고, 집행 불능 처리를 받은 적도 있다. 


그 뒤로 나름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는지 금전청구소송이나 가사 사건 등 소장 작성도 해보고, 상담도 해보고 많은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근데 나의 결정적인 단점은 사회생활에서 큰 문제가 있었는데 난 너무 솔직하다는 것이었다. 조금 안될 것 같지만 비벼 볼 건더기가 있다면 싸움도 붙여보고, 결과가 안 좋아도 배짱도 튕겨 보고 했어야 하는데 그게 안된 거다.  


회사에서는 승진도 시켜주고 쥐꼬리만 하지만 급여도 올려줬으며(사실 법무법인 쪽에 직급은 붙이기 나름이고 별 의미도 없다), 직원도 한 명 뽑아 주어 일도 수월해졌지만, 전체적인 업무들이 체계도 없었고, 혼자서 10여 명의 변호사들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니 소속감이 없었다(보통은 변호사에게 소속되어 경력이 쌓이면 서면 트레이닝을 해주며 내근 사무장으로 키우던지 아니면 영맨처럼 사건 사무장으로 경력을 쌓게 된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는 자꾸 영맨 같은 사건 사무장을 요구하게 되고, 서면 트레이닝이 되더라도 네가 사건을 가져와서 하라는 식으로 나오니 더 이상 빛을 볼 수 없었다. 하긴 인건비 아끼려고 지원금 고지도 없이 월급을 그렇게 준 사람들이 오죽했으랴마는 고작 "지참 채무(채무를 변제할 때는 채권자에게 가서 변제해야 한다는 것으로, 관할의 문제)" 얘기를 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들이, 남직원 몰래 간식을 사다가 냉장고에 채우는 그녀들이 한심하고 비루해 보이는 10년이 되어 갈 때쯤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변호사들이나, 법률사무원으로 재직 중인 모든 사람들이 내 처지에서와 같은 그런 분들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같이 일하며 지나친 변호사들 중에서도 같이 의견 나누려고 하고 내가 더 공부할 수 있게 도와준 감사한 분도 많았고, 함께 일할 때 동생처럼 날 물심양면 도와주신 직원 분들도 많았다. 


그렇게 모든 일에 불만이 쌓이고, 더 이상 일을 하기 싫어졌을 때 이력서랑 자기소개서를 쓰고 수정받기 시작했다. 무수히 많이 넣고, 무수히 떨어지고, 면접에 가서는 치욕스러움을 겪으면서 나름 깨달은 게 있었다. 

내가 내 꿈의 끝자락이라고 부여잡은 이 길이 남들이 보기에는 제일 쉬운 길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 치열했던 경력이, 찢어진 발바닥이 담보물권의 종류와 의의부터 물상 보증을 설명하라는, 왜 법무법인에서 일을 시작했냐는 면접관에 질문에 정말 처절하게 박살이 났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떨어지는 자존감과 가족들을 볼 때마다, 새로운 업무 지시가 올 때마다 괴로웠다. 이미 마음은 떠나 있었고, 이직을 해야겠다고 맘을 먹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주변에 회사나 기업으로 이직한 케이스가 극히 드물어서 정보도 없었고,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기업체에서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어떤 업무를 하게 되는지 정보가 너무 없었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고, 초초해지는 나의 일상은 점점 무기력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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