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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lochen Dec 26. 2023

엄마에게 받은 폭탄문자

가족과의 문제 그리고 답 없는 갈등

나는 시부모님을 보면 '나도 이런 부모가 되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든 자식을 위해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는 부모님.

(물론 금전적인 것 외에)

나는 이런 부모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들에게 인생의 조언을 들어본 적도, 뭔가를 의논한 적도..



심지어 나는 이혼할 때도 나 혼자 결정하고,

이혼 후에도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거나,

부모님이 내 아이들을 단 하루도 돌봐 준 적이 없다.

(몇 시간 부탁했다가 나는 언니라는 사람에게 쌍욕의 문자를 폭탄으로 받았었다.  내용은 네가 이혼했으면 니 새끼들은 네가 쳐 길러. 엄마에게 부탁해서 나한테 피해 입히지 말고.-부모님이 가게를 운영하는데, 엄마가 잠시 첫째 딸에게 가게 좀 봐 달라고 부탁했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엄마 그녀는 그녀의 첫째 딸과는 애증의 관계이다. 어릴 때부터 첫째 딸은 약했고, 힘이 부족하고(그렇다고 단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하거나, 수술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자기를  자기 딸에게 투영하여 온갖 응석을 다 받아주었다.


그 끝은 누구나 다 알지 않는가?

개망나니

그녀의 인생은 참 파란만장하다.

중학교 때부터 비슷한 애들끼리 놀며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담배 피우고, 그러다가 아빠에게 걸려

몽둥이로 맞고, 맞았으니 당연히 집 나가고.

엄마는 아빠가 너무 폭력적이어서 딸이 그런 거라며 딸 감싸기에 바빴다. 그 나쁜 친구들과 헤어지려면 이사밖에는 답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친구들에게는 말 한마디 못해보고 어느 날 그냥 멀디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


부모가 이사를 하면 뭐 하겠는가?

그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이 학교 빼먹고 다시 예전 동네로 친구 만나러 가고, 학교는 다시 못 다니게 되고..

그래서 내 기억으로는 엄마 그녀는 딸의 고등학교 교복만 3벌(전학, 전학, 전학) 이상 샀다. 그때는 교복이 무료가 아니었다.

그리고는 고등학교를 끝내 안 마치고 친구들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 시절이 정말 좋었다.

엄마의 딸이 나에게 담배 사 오라고 심부름시킬 때 "안 해"라고 해도 더 이상 뺨 때릴 폭군도 집에 없고,

무엇보다 엄마, 아빠가 좀 덜 싸웠는 듯했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자식이 포기가 안 되는 엄청난 인내심을 갖은 사람이다. 그런데 자식을 키우는 그 방법이 너무 쓸모가 없고, 효과도 없고, 본인 인생에 크나큰 독으로 올 방법이다.

돈.


그녀의 딸은 다시 돌아와 돈을 요구한다.

직장 다니기도 싫고, 죽겠다고 굶고, 별의별 쑈를 하면

마, 그녀는 또 들어준다.

30년 40년째 들어준다.

성형수술만 하면 직장 다시 다닐게.

혼자 살 원룸만 구해주면 직장 다닐게.

붓기 빠지면 직장 알아볼게. 그러다 또 몇 년 조용히 사라졌다. 남자가 생겼다는 뜻이다.

헤어지면 엄청난 빚을 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가 유일하게 갖은 게 외모와 키인데 그 외모로 그렇게 멍청하게 사는 것도 참...(이모가 엄마에게 들은 말로는 늙은 남자는 싫고, 젊고 잘생긴 남자가 좋아서 자기가 돈을 쓴다나.. 기가 차다..)


20대, 직장 다니면서 크게 충격을 먹은 적이 있다.

옆 동료가 투털거리며 언니에게 약간의 목돈을 이체하면서 투덜거린다.

"아~ 우리 언니, 언니가 부모님 화장실 불편하다고 이번에 싹 고쳐드린다고 저보고 300만 내래요. 암튼 부모님 생각 엄청 많이 해요. 효녀야 효녀!"


아. 첫째 딸이 부모님을 이렇게 생각하고 돈을 쓸 수도 있구나. 내 평생 언니라는 사람은 부모에게서 돈을 못 뜯어가 한이 진 사람이었는데..


그전에도 내 언니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 이야기를 들은 후 나는 왜 정상적인 언니가 없을까? 란 생각에 슬퍼졌고,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면서는 저런 존재는 내 주변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실 이 사람과 대화해 본 건 10년이 넘는다.(일방적인 폭탄문자 받은 건 제외시켰다. 난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으니)


그 이후 그녀는  내 주민번호 도용으로 내 의료보험 이용해서 내가 곤란했던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엄마가 시킨 거라고 했다.(내가 해외 살 때 전 시부모 집으로 우편물이 왔다. 해외거주자가 의료보험을 사용했다고 벌금을 내라고. 전 시어머니는 상큼하게 형광팬으로 밑줄을 그어놓고 나에게 그 우편물을 전달했었다)


엄마 내가 난리를 치자

"어차피 너 해외에 있었을 때 몇번 쓴건데 뭘.  네 언니 빚 때문에 주민번호 말소 되었어. 이번엔 이모들이 언니 빚 갚아주지 말래서 안 갚아주고 있었지. 그런 우편물이 가는지는 몰랐네"


자기한테 피해 주지 말라며 굳이 내가 쓰지도 않는 페이스북에 내 이름을 찾아 상스러운 문자를 엄청나게 보냈던 이가 내 인생에는 이렇게 피해를 준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항상 엄마가 있다.


난 어릴 때부터 항상 엄마가 힘들어 보였다. 아빠 때문에, 딸 때문에..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늘 "우리 집의 등불" 이라고 했다. 나는 문제도 안 일으키고, 알아서 청소하고, 용돈 모아서 다시 엄마에게 돌려주고. 그래야 엄마가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몇 분은 엄마가 행복했겠지만.


얼마 전,

아빠가 암에 걸리자 집구석에서 평생 놀고먹은 첫째 딸의 존재가 존재감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엄마도 다리가 아프셔서 첫째 딸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빠도 병원에 모시고 가고, 가게일도 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입김은 세진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 카톡으로 신형 아이폰 구매 취소했다는 알람을 받았고, 즉시 그녀를 의심했다.

엄마에게 연락해 물어봤고, 엄마는 아니라고

더 이상 오해하지 말고 살자고 했다.

피식...


그 이후 엄마폰으로 온 상상 못 할 험한 욕 메시지들이 나에게 왔다. 엄마의 첫째 딸이었다.

니 인생이 너무 잘나서 잘난척하고 사느라 바쁜 건 알겠는데 집에 보이는 개매너는 작작 좀 해라.. 뭐 이런 메시지였다.(해외 살면 인생 엄청 잘나 지나 보다. 그래서 30대에도 부모가 유학 안보 내줘서 내 인생 이 꼴 났다고 그렇게 부모탓을 했나 보다. 그녀는..)

그때 자기가 실수로 이용한 치료비도 이체 할 테니 통장 번호 쓰라고도 했다. 이제 가게 운영하면서 가게돈은 지돈이 되었다보다.

갑자기 자기는 부모를 지키는 세상 효녀가 되어있었고,

나는 멀리 살아 부모도 안지키는 그녀 말대로 "쌍년"이

되었다.


난 독일로 떠나면서 엄마에게 두 가지만 지켜달라고 했다.


첫째, 내가 사는 얘기 엄마 첫째 딸에게 하지 말 것.

둘째, 내가 엄마에게 보내는 내 아이들 사진을  전 시어머니에게 보내지 말 것.

(전 시어머니가 잠시 아이들과 살 때 아이들에게 상처를 너무 많이 줬고, 사진 보고 싶으면 전 남편에게 말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엄마는 둘 다 어겼다.


엄마...


나는  이제 이 사람과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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