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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윤로윤 May 27. 2023

[괜찮은 인생을 살고 싶어] 1월에는 늘 아프다

감기가 아닌 스트레스


매년 새해가 돌아오면 나는 꼭 한 번씩 아프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매서운 겨울의 감기정도로 여기고 진료를 받고 약을 먹어가며 며칠 버티는 것으로 괜찮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감기는 해를 더 해 갈수록 이곳 저곳으로 퍼지며 더욱 지독해졌다.


여느 직장들과 다름없이 내가 다니는 회사 또한 새해는 매우 분주하게 시작이 된다. 지난 연말에 승진을 했든, 승진에 미끄러졌든, 새해는 더욱 매섭게 몰아치면서 시작이 된다. 승진을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해야 하고, 승진에 미끄러졌다면 다시 한번 1년을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을 때인데 나는 늘 분주했다. 정작 한 발작 물러나서 적당히 흐르는 물결에 둥실 떠있기만 해도 그럭저럭 잘 흘러갔을 텐데 나는 무얼 위해 그렇게 분주했을까?


1월의 냉랭한 온도 때문인지 자고 일어나니 목이 칼칼해졌다. 그리고서는 기침이 나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는데 삼킬 때마다 통증이 느껴진다. 며칠 전 회사 앞 내과에서 받아온 감기약이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데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해 집 앞 가정의학과에 들려 진찰을 보기로 한다. 원장님은 나를 진찰하기 시작하는데, 어쩌면 한의학을 복수 전공하셨는지 왼쪽 손목의 맥을 짚더니 크게 놀라신다. 이 정도였으면 밥 먹는 것이 힘든 것 은 물론, 눈도 잘 보이지 않고 귀도 먹먹하지 않았냐며 왜 이제야 병원을 찾았냐고 나무라신다. 순간 나의 의아한 표정이 말로는 뱉지 못한 생각을 대신 비춰준다. 나는 정말 몰랐다. 이 정도의 불편함은 세상사람 모두가 버티며 사는 줄 알았으니 말이다.


원장님의 꾀나 걱정스러움에 놀란 나는 무슨 큰 병인 것만 같아, 단순한 감기가 아니었냐는 물음을 던지는데, 진료실 안에는 걱정으로 꽉 채운 적막의 공기가 흘렀다. “실례지만 하시는 일이 어떤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까지 어떤 일 을 하시는지 궁금하네요”, 결론은 스트레스였다. 나는 순간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을 이어 간다. “그냥 일반 회사에 다니는데, 연 초라 신경 쓸 일들이 많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 매년 연 초마다 이렇게 아프곤 했는데 감기가 아닌 거예요?” 원장님은 이해가 어렵다는 표정으로 양해를 구하고는, 귀 뒤쪽으로 이어지는 뒤통수를 지그시 눌러주다 또 한 번 놀라신다.


귀 뒤쪽의 혈이 꽉 막혀 있을 정도로 왜 그리 버티면서 지냈냐고 연신 다그치신다. 그렇게 양쪽의 혈을 몇 분 정도 눌렀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뿌옇던 시야가 갑자기 잘 보이기 시작했다. 이 원장님 의사 면허증은 있는 분이 맞을까? 한의원에 계셔야 할 분이 아닐까? 혼자만의 오지랖이 통증에 섞여 함께 흘러갔다.


신기하게도 원장님의 지압만으로도 훨씬 선명해진 시야로 병원을 나와 약을 처방받으러 가는 계단에 멈춰 선 나는, 갑자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유가 가득 찬 눈물 몇 방울이 계단으로 뚝뚝 떨어진다. 며칠 쉴 수 있으면 회사에 말하고 쉬어야 한다는 원장님의 말에, 연초 라 그러기가 쉽지 않다며 수액이라도 맞고 버티겠다고 했다. 그렇게 수액을 맞고 처방받은 약에는 ‘신경안정제’라는 성분의 약이 소량 들어가 있었다.​


계단으로 떨어진 눈물 때문이었는지, 처방받은 약에 들어가 있는 신경안정제 때문이었는지, 눈은 감고 있어도 마음은 잠들지 못 한 밤이 흘러가고 나서야, 팀장님께 어려운 말문을 꺼내 이틀을 쉬기로 했다. 회사생활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갖는 연 초의 휴식이었다.


건강식을 챙겨야 할 것 같아 삼계죽을 시켜 천천히 조금씩 한 그릇을 비워 내고, 평소 TV볼 시간도 없던 삶들의 연속이었기에, 허락된 이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잔잔한 애니메이션을 몇 편 본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세상물정 모르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채로, 우여곡절을 겪어 나가지만 꿈과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렇게 간절히 세상에 외치고야 마는 주인공들에게는 비로소 평안한 날들이 찾아온다.


왜 그렇게 회사 일에 인생을 갈아 넣으면서까지 고군분투하며 살았을까? 자격지심 때문이었을까? 대충 살아도 되는데 왜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 스스로를 몰아 쳤던 것일까?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게 뭐였지? 이렇게 아프고 나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을...,


조금은 대충 살기로 한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상은 대충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으니, 지금보다 아주 조금만 대충 살기로 한다. 나 하나쯤 대충 살아도 회사일은 잘 돌아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문제없을 것이며, 심지어 월급도 꼬박꼬박 나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본다.​


조금은 대충 살아야 오늘 아침 하늘이 푸르른지, 따뜻한 봄바람이 불 때 귀엽게 올라오는 새싹이 초록인지 연두 빛깔인지를 볼 수 있고, 먹고 싶은 리스트를 나열해 가며 점심의 메뉴를 고르는 일과, 퇴근길 가로등 불빛이 어제보다 더욱 빛나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오늘부터 나만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되기로 한다. 서투르고 실수투성이의 주인공이 우여곡절 많은 난관을 거치고 나면 그토록 그리던 꿈과 희망을 얻고는 한다. 지금 겪는 거센 파도와 비바람도, 시간이 지나 어느 나이가 될 즈음에는 두려워 피하지 않고 시원하게 맞닥뜨려 즐길 수 있으리..., 돌아오는 내년의 1월에는 더 이상 아프지 않고 건강히 보내기 위해, 나는 그렇게 처음 살아보는 나의 인생이라는 애니메이션 의, 서투르지만 열렬한 주인공이 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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