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31일의 루틴은 진행 중
돌아보면 조용한 해가 있었으려나, 올해도 외치게 된다. 책상에 이리저리 널린 택배 영수증처럼 많은 일들이 오고 갔다고. 상수로 취급되는 자잘한 걱정은 그대로인데, 뜻밖의 어려움을 견뎌내야 한다거나 오지 않은 미래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진다거나. 일부는 덜어지지만 새로운 무엇이 찾아온다. 한 없이 맑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도 물음표는 여전하다.
31일의 일기
매년 12월 31일 밤에 일기를 쓰곤 했다. 대개 그 시절의 고민이나 바람을 시각까지 꼼꼼하게 포함하여 적었다. 일부는 지금도 달성하지 못하는 목표다. 그때는 아무래도 학생이라 공부를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문구를 시작으로 하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적고, 더 나아가 환경과 전쟁에 대한 걱정도 꼭 한 줄씩 적었다.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다이어트. 나는 맛있는 것을 먹을 뿐이다. 다만 그것들이 내 몸의 항상성을 유지하기에는 버거울 뿐.
나름 비장한 마음으로 마침표를 찍던 어린이가 집 밖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자란 후로는 친구들과 함께 있거나 여행을 갔다. 두꺼운 노트를 놓고 단 몇 줄의 글을 적는 행위에 흥미를 잃었던 모양이다. 쿨 해 보이지 않았던 걸까. 아마 그보다는 눈앞에 놓인 이벤트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멀어져 멈추었다. 그저 가끔씩 노트를 보며 웃을 뿐이다. 지금 다시 쓴다면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근육질의 몸을 갖고 싶다는 이야기를 쓰려나.
31일의 여행
연말의 여행은 어쨌거나 평상시와는 조금 다르긴 다르다. 어수선하면서도 새로운 마침표라고 할까. 사실 약간의 도피와 리프레쉬가 섞여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는 현실감이 없는 상태가 된다. 무엇인가를 돌아보기 위한 멈춤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이따금 한 번씩 떠올릴 뿐이다. 올 한 해도 수고했다. 내년에도 잘 지내보자. 무엇보다 건강하자. 그래서 좀 담백하다 싶어 좋기도 하다.
올해는 회사에 변화가 많았다. 웃픈 순간들을 AI로 웹툰 시리즈처럼 그려가며 웃어넘기거나, 몸의 항상성을 깨뜨리는 방식으로 넘겨보곤 했다. 어쨌든 하루는 지나고 한 달을 채우면 월급이 나오니까 입술에 침을 바르고 네네 하면 된다고 다짐해도 쉽지 않았다. 늘 입이 텁텁한 기분으로 무기력하게 떠다닌 것 같다. 그래도 다시 쓰기 시작했고, 마지막은 좀 더 또렷한 정신으로 여행을 떠나왔으니 그쯤이면 됐다. 수고했다. 꼭 건강하자.
마지막은 마지막이니까 좋아하는 방식으로 맞이하고 싶어. 산속 카페에 들어와 창가에 앉았다. 누군가는 연말을 맞아 사철 푸른 소나무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난 호숫가의 산책로를 걷고 있다. 그래도 지금, 여기, 부드러운 조명과 은은한 음악 아래,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타자를 치고 있으니 됐지 뭐. 연말마다 떠돌아다니는 토정비결이나 사주풀이가 말해주는 희망회로에 잠시 웃다 집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