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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Nov 09. 2016

각자의 시간

오스트레일리아 그레이트 오션 로드 & 그램피언스 투어

하루의 시작도 끝도 어둠에 잠기는 계절. 힘들게 이불에서 몸을 꺼내어 창 밖을 바라보면 아직 까맣다. 칼퇴근을 하고 부리나케 빌딩을 벗어나도 밤은 이미 도착해있다. 보통의 하루는 바깥 날씨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숫자로 정해진다. 어지간한 눈, 비는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한 참고 사항일 뿐. 하늘이 무슨 색인지,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 지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1부터 24까지 그려놓은 숫자를 따라간다.


Great Ocean Road

200킬로미터가 넘는 바닷길에 단순하고 명료한 이름이 붙었다. 워낙 넓은 땅덩이를 가진 터라 대부분의 도로가 한가롭겠지만, 호주 동남부의 해안도로만큼은 늘 분주하다. 사람들이 끝없이 몰려드는 길. 멜버른에서 출발하는 투어버스에 섞이기 위해서 오늘 하루는 ‘05’시에 시작되었다. 영화배우 잭블랙(Jack Black)을 닮은 가이드와 함께 아침을 맞는다.


며칠 전에 바닷길의 어느 집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그 길을 지날 수가 없단다. 우리의 잭블랙은 실망한 이들을 달래며, 에둘러 가는 길도 멋지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오늘의 여행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짜증을 내봤자 의미 없음을 이미 깨달은 사람들일까, 버스 안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버스가 숲을 뱅뱅 돌아 다시 바닷길로 접어든다. 해변에 둥그렇게 모여 어색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국적도 외모도 딱히 비슷한 점은 없지만, 차분한 말투와 평온한 미소의 사람들. 가이드의 시계를 따라 반나절이 이렇게 지나가는 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곳. 온라인에서 오늘 내가 찍은 것과 비슷한 사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년 전에 다녀간 이들이 찍은 사진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얼굴에는 1년 전 사진에는 없었던 세월이 얹혀있는데도 이들은 별다르지 않다. 시간은 절대적으로 흐르는데, 자연의 움직임을 우리는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잎이 나고 지는 것은 그나마 수월한데, 거대한 바위의 모양이 변해가는 것은 내 얼굴의 주름처럼 쉽게 알아챌 수가 없다. 과학의 힘을 빌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Twelve Apostles & Loch ard Gorge


그들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 걸까? 강물이 말도 없이 오천 년을 흘렀다는 노래 가사처럼, 긴 시간 동안 조금씩 이별하는 그들. 어쩌다 한 번쯤은 거대한 힘이나 인간의 마음에 의해 준비 없는 이별을 맞이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개는 안녕할 시간이 충분했을까. 제자리를 떠날 수 없는 삶이란, 다가올 미래에 순응하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겠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래서 원래 자유가 없었던 대자연이 우리보다 더 평온하게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막상 태풍에 뿌리 뽑힌 나무를 목격하면, 또 다른 기분이 들긴 하지만.

London Bridge & Nibbling Away



Grampians National Park

여행을 떠나면 평소와 달리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중요해진다. 특히 야생의 밤은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어둠이 깔리기 전에 숲 속에 들어가야 한다. 버스 안에는 저녁 무렵의 피곤하고 나른한 분위기가 감돌고, 사람들은 들판에 깔리는 해 그림자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흐름을 깨는 것은 우리의 잭블랙. 이번만큼은 그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한껏 묻어 나왔다. 합성한 것처럼 솟아있는 산과 노란빛으로 물든 들판. 버스의 기척을 느낀 이들이 차례로 몸을 일으킨다. 물을 마시다 놀란 이들은 넌 누구냐고 묻는 듯 한참을 경계하더니 총총거리며 떠나갔다. 해 지는 시간에 맞추어 그들의 하루도 끝이 난다. 우리들은 저녁식사를 방해하는 침입자들.


숲 속의 아침은 분주했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동물이나, 다양한 톤의 새소리, 피톤치드를 대차게 뿜어대는 나무들. 숙소에서 짐을 꾸리는 우리 모두 마음이 급했지만, 오늘의 일정을 시작해야 하는 잭블랙이 가장 바쁜 것 같다. 그래도 여자 아이들이 그를 돕는 순간만큼은 그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해 보였다.


멜버른에서 235km 떨어진 그램피언스 국립공원(Grampians National Park)은 사암이 군데군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산속의 야생동물뿐만이 아니라, 이름난 전망대에서의 인증샷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망대를 순회하며 생김생김을 조금씩 엿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사람들.

Boroka Lookout


조금 힘들지만 멋진 폭포(Mackenzie Falls)와, 편하지만 평범한 폭포로 가는 갈림길. 잭블랙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대개는 ‘멋지다’는 단어에 휘둘려 수고로움을 택했다. 여행 중에는 인구통계학적인 특성과 상관없이 호랑이 기운이 솟음이 분명하다. 꽤나 거대한 폭포에서 맹렬하게 떨어지는 물줄기. 그 위로 튕겨지는 햇빛이 자아내는 풍경이 근사했는지, 오늘은 잭블랙도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램피언스를 소개하는 자료에서 꼭 한 번은 언급되는 장소. 다소 지루하고 평이한 길 끝에서 아찔한 절벽이 나타났지만, 언제 부서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바위에 올라설 용기는 없었다. 성의 없다 싶으면서도 어찌 보면 딱 맞는 이름이다. 천연 발코니(The Balconies)는 오래전부터 이런 생김새로 우리들을 맞이했다. 한 순간도 멈춰있던 적은 없었을 텐데, 그 차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한계. 언젠가는 저 높은 곳에서 사라질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소식을 전해 듣기는 어렵겠지만.

The Balconies


잭블랙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최대한 짜증을 눌러가며 속력을 낸다. 집합 시간을 어긴 이들에게 서운한 마음과, 다음 일정을 지킬 수 있을 지에 대한 걱정이 한데 섞였다. 우리는 멜버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다른 도시로 떠나는 버스 시간을 맞춰주는 데까지가 그의 몫이었다. 무사히 할 일을 마친 그는 쿨하게 웃으며 떠났다. 이제는 다른 버스의 ‘출발시각'을 기억한다. 나의 오늘은 이렇게 끝이 난다. 내일은 환하게 밝은 하늘 아래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누군가는 다른 기준으로 영속된 시간을 살아가겠지. 가끔은 서로를 스쳐 지나기도 하겠지만, 결국 그렇게 각자의 시간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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