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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Nov 01. 2016

시간에 물들다

단풍을 맞이하는 고창 '선운산 + 선운사'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서늘해지면 초록빛이 잦아들고,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그럴 때면 찬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서성이기도 했다. 우연히 들려오는 유행가의 멜로디에도 마음이 일렁이는 낭만적인 계절. 열렬한 시간을 나눈 이들은 얼마만큼 서로에게 스며들었는지 되짚어 보기도 한다. 노을처럼 붉게 물드는 우리의 마음.


선운산은 얼굴이 자주 빨개지곤 했다. 봄에는 동백꽃으로, 여름에는 꽃무릇으로 뜨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제는 한바탕 산자락을 붉게 물들일 시간이다. 흐린 날에는 하늘이 낮아진 것 같아서 그런 걸까, 오늘의 선운사는 유난히 고요 속에 잠긴 듯하다. 이따금 시간을 알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절복을 입은 이들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산길을 걷는다. 템플스테이에서 무엇을 내려놓고 싶었던 걸까.


늦가을에는 물길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늘어선 나무들이 주인공이다. 정직하게 흐르는 시간을 따라 고요하게 번져가는 빛깔. 성격이 급한 누군가는 이미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다. 짱짱하게 초록을 빛내는 이들에게도 남은 날은 그리 많지 않다. 한편, 계절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은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한껏 노랗게 물든 나뭇잎 위로, 또 다른 잎들이 얹혔다. 때가 되면 모두 저 아래로 내려가겠지. 준비를 마친 씨앗은 뱅글뱅글 돌며 낙하하기도 한다. 제대로 착지했다면, 그대로 몸을 웅크리고 시간에 기댈 차례. 물 위로 떨어진 이파리들은 가볍게 떠가거나, 구석에 고여 물빛에 섞인다. 한 겹, 두 겹, 쌓인 낙엽은 누군가의 이불이 되어주기도 하고, 모양을 바꾸어 흙으로 스며들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물들어간다.


달력에 공휴일이 없는 늦가을이란 조금 서글프지만, 붉게 물드는 숲에 위로받곤 했다. 마음먹고 떠날 짬이 없을 때도, 출퇴근 길에 마주치는 나무 한 그루쯤은 찬연하게 빛났다. 감성이 출렁이는 계절이 돌아왔고, 올해의 단풍도 여전히 아름답다. 지독한 것들이 사회에 스며들지만 않았어도 더욱 빛났을 지금. 올곧은 삶을 꿈꾸는 마음이 번져나가면, 우리 사는 세상도 아름답게 물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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